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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키 Mar 02. 2023

지금 부자가 되는 중입니다

다시 부자 되기 프로젝트

나는 침대에 누워 스키 강사가 카톡으로 보내준 영상을 반복해서 보고 있었다. 똑같은 영상을 아무리 반복해서 봐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방금 전에 보았을 때 집중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내서 더 눈여겨보고 더 신경 써서 보았다.


그렇다. 이것은 내 '자식'이 스키 강습을 받는 영상이기 때문이다. 1:1 개인 레슨을 신청하고 2시간이 지나자 금방 슬로프를 오가며 스키를 타는 아이의 모습에 돈이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돈을 써서 개인 레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강습이 끝난 뒤 만난 아이의 얼굴은 그야말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춘기가 시작된 영향으로 무뚝뚝한 표정을 짓곤 하던 아이가 스키 강습이 끝나자 입꼬리가 올라가고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재밌었다'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아이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엄마로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1 2시간 강습은 평일 13만 원, 주말 15만 원이었다. 어느 스키장에는 키즈프리미엄스키스쿨이라는 것이 있는데 4시간짜리 1:1 강습이 34만 원이고 놀랍게도 겨울 방학 내내 모든 날짜가 매진이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돈 많은 사람들이 많다.) 나는 아이에게 2번의 스키강습을 받게 했고, 내년에는 아예 일주일간 스키장 콘도에 투숙하며 아이에게 스키 강습을 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돈이란 이렇게 좋은 것이다. 내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고, 돈을 쓴 나를 이렇게 가슴 벅차게 만들어준다.  나 역시 아이를 맡긴 2시간 동안 자유롭게 스키를 즐길 수 있었다. 아이의 강습이 끝나고 같이 리프트를 타고 중급자 코스로 올라갔다. 정말 감개무량할 정도로 행복했다.




나는 자수성가한 아버지 밑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그 시대의 누구나 그렇듯, 모두가 가난하고 정이 많은 사회 분위기를 경험하며 자랐다. 그러나 사업을 시작한 아버지가 얼마 안돼 자리를 잡고 8~90년대 한 달 수입이 천만 원에서 삼천만 원까지 달할 정도로 사업이 잘되어 집안이 곧 빠르게 일어났다. 그러나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고 아버지가 마지막 결단으로 실행한 투자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사업에 공동투자했던 관련 인물들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고 파산했다고 들었다.)   그 후에는 돈이 될 만한 부동산이나 보험을 결국 모두 처분하고 집 한 채가 남았는데, 결국 버티고 버티다 그 집마저 날아가게 됐다.


우리 가족은 빠르게 가난해졌고 겨우 남은 돈을 긁어모아 지은 지 30년이 넘은 낡은 빌라에 전세로 다시 전월세로 살게 됐다. 이때 아버지가 돈을 벌겠다는 잘못된 집착을 버렸다면 우리 가족은 훨씬 더 빠르게 경제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는 전 재산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로 이성이 마비된 채 무조건 다시 사업을 시작해야겠다는 독한 결심으로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 어렸던 나와 동생들은 이러한 아버지를 말릴 수가 없었고, 결국 이때 무리하게 반복해서 사업을 벌인 탓에 오히려 큰 빚을 지고 말았다.


나와 동생들이 아무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생활을 꾸려가려고 해도 아버지의 사업 앞에서 모든 것이 날아갔고, 그때 아버지는 악에 바친 사람처럼 우리를 닦달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참다못한 내가 제발 자식들이 벌어온 돈으로 그냥 살자고 애원을 해도 아버지는 미친 사람처럼 돈을 벌어야 한다고, 사업을 해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아직도 나는 이 시절 아버지의 눈동자에 번뜩이던 그 분노와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기억하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이 완전히 재기불가능할 정도가 되어서야-정말로 단 한 푼도 동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사업에 대한 집착이 멈추었고 이 시간을 나는 '완전히 망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라고 부른다.


부자는 망해도 3대가 산다는 말이 있는데 10년에 걸쳐 집안의 돈이 완전히 깡그리 씨가 마를 때까지 아버지는 계속 사업과 재기에 집착했다. 결국 집안 곳곳을 뒤져도 만원 한 장이 안 나와 가족들이 엉엉 울 정도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집착은 겨우 멈췄고 남은 가족들은 그때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 가족에게 남은 것은 정말로 낡은 세간과 몸에 걸친 옷가지 밖에 없게 됐다. 그것은 점점 더 낡은 집으로 이사를 할 때마다 부끄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버지의 돈에 대한 맹목적이고 부정적인 집착이 우리가 빚을 갚기는커녕 생활이 최악으로 치닫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렇게 10년이 지나자 우리는 극도의 가난뱅이가 되어 있었다. 단순히 돈이 없는 것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업에 자식들의 명의로 대출까지 받아 매달 이자 상환만 해도 300만원에 달할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10년 간 최악의 시간을 보냈다. 나와 동생들은 여기에 가족들의 생활비까지 대면서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처절하게 노력했다.


정말로 살아 있어도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가족은 이런 어려움에도 어떻게든 웃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려고 했지만, 아버지의 사업병과 재기를 못하는 데 대한 분노와 좌절감은 우리 가족을 너무나 힘들게 만들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결국 부모님은 동반 자살을 하려고 하셨다. 나는 그 날밤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부모님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밤중에 나가셨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막연히 알아챘고 부모님을 향해 그 어느 때보다 더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때의 나로서는 죽음을 선택한 부모님을 막을 수 없었고 다만 부모님과 진짜 마지막이 된다면 슬픈 얼굴이 아니라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그렇게 현관문을 떠나고 나서 나와 동생들은 그날밤 얼싸안고 소리 내 울었다.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고 부모님이 안 계신 세상이 두려웠다. 그러나 뜻밖의 기적이 일어났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너무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바람에 부모님은 기가 막혀서 저렇게 철이 없는 것들을 두고 어떻게 죽을 수 있느냐, 어떻게든 살아보자라고 마음을 바꿔먹었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오셔서 다시 살아보기로 했어도 현실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 가족이 있어 서로 버티며 살아갔다. 최악의 10년 -아버지의 광적인 집착이 멈춘 후에야 완전히 0에서 겨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우 아버지의 집착이 끝난 후에야 다시 살아가며 여기저기 돈을 빌려 반전세 식으로 살다가 천천히 돈을 갚고 돈을 모아 나가며 전월세 집에서 전셋집으로, 다시 낡은 빌라집을 자가로 살 수 있었다. 이제는 햇빛이 드는 30평대 아파트로 이사하여 스키 강습도 돈 주고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현재 우리 가족의 총자산은 20억 정도다. 부유한 강남 사람들이 본다면 이것은 집 한 채 값도 안 되는 작은 돈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0에서 아니, 마이너스에서 분투하여 10년간 일구어낸 결과물이다. 요즘에는 부자라고 말하려면 100억은 있어야 한다는데 아직 그 정도 부자는 아니다. 하지만 난 분명히 느끼고 있다. 지금 부자가 되는 중이라고 말이다.  


지금의 경제적인 여유를 느끼며 나는 어떻게 우리 가족이 10년 안에 다시 중산층에 속하게 되었는지 써보려고 한다. 완전히 망하기 10년, 다시 재기하기 10년이라는 세월을 겪으면서 나는 가난함으로 가는 길, 부유함으로 가는 길, 세상에는 이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길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고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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