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뱅이 시절, 형제들끼리 일본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지금도 패키지여행은 잘 가지 않고 모든 사항을 직접 준비하는 편이지만 일본어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여행사에서 가장 싼 자유여행(숙소만 예약)을 선택했다.
교토, 오사카라는 흔한 일정이었는데 돈을 아끼느라 10만 원짜리 방을 형제들이 함께 사용했다. 욕실이 딸린 방 하나에 이불을 깔고 눕는 식이었다. 숙소는 일본 답게 깨끗했지만 너무 허름했고, 숙소에 실제 적힌 가격은 1박에 우리 돈 5만 원이었다. 여행사가 가격을 2배를 받은 것이었다. (여행사도 당연히 이윤이 남아야겠지만, 이때 속으로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전화를 받은 여행사 직원이 숙소 예약을 한다면서 잠시 주저하는 듯싶더라니.)
우리는 종일 걷고 지하철을 타며 돌아다니느라 녹초가 되었고, 이동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려 막상 관광지를 많이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한 번은 겨우 힘들게 도착을 했는데 관람 시간(pm.6시)이 막 끝난 상황이었다. 난감해하는 우리들더러 친절한 직원이 자기가 기다릴 테니 정원을 돌아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 덕에 우리는 오히려 관광객이 한 명도 없는 아름다운 정원을 오로지 우리 형제들끼리 호젓하게 돌아보는 행운을 얻었다.
정원은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고, 우리가 마치 엄청난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여기가 천국이네. 여기가 낙원이야!"
나는 이렇게 감탄했는데 나중에 직원에게 감사하며 나와 티켓을 보자 영어 이름이 PARADISE GARDEN(낙원 정원)이라고 찍혀 있어서 "우와 우리가 진짜 낙원에 왔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첫 일본 여행이었는데 안타까웠던 점은 돈이 없어서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면서도 뭔가를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워낙 귀엽고 예쁜 것들이 많았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내가 교토의 금각사에 도착해서 큰 마음을 먹고 금테가 둘러진 접시를 구입했는데(당시 2만 원 정도) 그 사실을 알게 된 동생들이 그걸 사면 어떻게 하냐고 나무라는 바람에 환불을 하려고 기념품 샵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한번 출구를 통해 한 발자국이라도 밖으로 나오면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나는 수위와 한참을 얘기하며 사정을 설명했다. 일본인 수위는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결국 안된다고 거절했다.
이때 일본인들의 매뉴얼에 대한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도 알게 되었고, 하루 종일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너무 허기가 져 승강장에서 과자를 먹으려다 저지당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지저분하게 먹은 것도 아니고 칸초 같은 과자를 딱 하나 꺼내서 먹었는데도 먹지 못하게 해서 깜짝 놀랐다. (제복을 입은 지킴이 분이 고압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매우 망설이다가 다가와서 이야기하셨다.)
일본 여행을 가겠다는 결정을 부모님께 말씀드렸을 때, 여러 가지 의미로 무거운 얼굴로 듣고 계시던 아버지가 과거 본인이 일본 출장을 다니곤 했을 때 쓰고 남은 잔돈을 모아놓았던 것을 보태 쓰라고 주셨다.
어머니는 "요즘 아이들은 해외여행을 그렇게 많이 다닌다는 데 너희들도 꼭 가보거라." 하셨다. 보태줄 돈은 없어도 진심으로 응원해 주셨다. 아직도 두 분의 얼굴이 어제처럼 선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아버지가 완전히 망했고 나와 동생들이 번 돈으로 생활비의 대부분과 대출 상환과 이자를 갚아 나가고 있었기에 돈을 벌어도 언제나 빠듯하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한번 가보자고 굳게 마음을 먹었었다.
우리는 교토에서 당일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저녁에 밖을 돌아보았다. 약간 우스워보이는 작은 행상들이 늘어진 거리가 있었다. 한 아저씨가 자기 앞에 30개 정도의 사과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과일장사를 하면서 이렇게 과일을 적게 갖다 놓고 소꿉놀이 하듯 파는 사람은 내 평생 처음 봤다.
우리는 목이 말라 사과를 사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주신 일본돈을 냈더니 그것은 일본에서 이미 구권이 되어 버린 옛날 돈이었다. 사과 장수는 우리에게 짧은 영어로 "유어 그랜드파더 그랜드마더 기브 유? (너의 할아버지가 주신 것이냐? 할머니가 주신 것이냐?)라고 물었다.
부끄러워서 그냥 예스라고 말했더니 뜻밖에도 우리에게 돈을 내지 말고 사과를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거절했지만 결국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검은 비닐봉지에 사과를 받아 왔다.
숙소에 돌아와 사과를 먹었는데, 세상에 너무나 달고 맛있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기본 과일을 먹어도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있는 거야?"
사과 장수의 친절도 고마웠지만 우리는 사과의 맛에 더 놀라워했다. 사과가 예상을 깨고 너무 맛있어서 이런 사과를 공짜로 주었다는 사실이 더욱 감동적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여러 마음이 교차했다. 아버지가 멋진 사업가였을 때 이렇게 일본을 오갔다는 생각, 일본인 공원 직원과 사과장수의 따뜻한 마음, 종일 걷고 지친 다리를 끌고 허름한 숙소에 돌아와 동생이 '우리가 거지 여행을 온 거네.'라고 말했던 기억까지도.
나는 얼마 전 지인들과 170만 원짜리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다. 똑같은 교토-오사카 일정이었는데, 아주 호화로운 여행은 아니었지만 과거의 가난뱅이 여행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번에는 관광버스를 타고 다니니 편하게 앉아 관광지를 하루에 네다섯 군데씩 돌아보고 식사도 괜찮은 맛집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나와 동생들이 돌아본 정도는 단 하루면 다 돌아보는 정도였다.
일본인 수위에게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던 금각사도 다시 방문했다. 그때처럼 출구로 나오면 여전히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싱긋 웃었다. 지금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가난하면 여행의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러나 가난할수록 더 노력해서 여행을 다니도록 해야 한다. 가난뱅이로 여행을 다니면 더 사람들과 마주칠 기회가 많고 그것들이 세상 사람들의 인정과 삶의 애환을 배우는 기회가 된다.
내가 가난했기에 동생들과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교토를 걸어서 돌아다녔다. 그러다 뜻밖의 친절과 배려를 만나는 고마운 경험도 할 수 있었다. 170만 원짜리 패키지여행을 떠났다면 관광버스 위에서 편안하긴 했겠지만 사과를 얻어먹는 인간적인 경험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집이 망한 뒤 나의 부자 친구들 4명과 함께 카페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폐지 줍는 노인 이야기를 꺼내자 그들은 그런 장면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다고 했다.
나도 놀랐고 그들도 놀랐지만, 부자라서 알 수 없는 사실도 있는 것이다. 부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도무지 가난한 사람들을 (자기 고용인으로 쓰지 않는 한) 만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달린 뒤 부자 동네의 고급 아파트나 전원주택 같은 단지로 들어가는데 그들이 단 한 번도 폐지 수집 노인을 본 적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처럼 세상에는 돈이 없어서, 아니 돈을 안써서 보고 듣게 되는 것도 있다. 사치스러운 여행을 하지 못해도 가난하면 가난한대로의 여행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을 기억하면 몸은 조금 수고롭더라도 가슴을 당당히 펴고 떠날 수 있다.
요즘에는 인스타 등 SNS에서 화려한 호텔 투숙을 자랑하는 사진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남의 사진에 위축되지 말고 '나를 위한 무전(無錢)여행'을 당당하게 떠나자.
국내든 해외든 혹은 그것도 안되면 동네 뒷산이라도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많이 돌아다니자.
집에 틀어박힐수록 마음은 지치고 무기력해진다.
식물이 해를 보듯 밖으로 나가야 돈이 없더라도 밝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대단한 여행이 아니더라도 돈과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일상 속의 소박한 여행을 계획해보라.
산책도 아주 좋다.
밖을 나가야 살아가며 쌓이는 마음의 때가 벗겨진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으면 낡은 자전거를 타고 한강까지 달리곤 했다. 중학생 때 타던 자전거라 많은 이가 흘끔거렸고 속도도 잘 나지 않아 우스웠지만, 그 고마운 자전거 덕분에 나는 무사히 성산대교까지 왕복할 수 있었다.
자기 마음속 때도 벗겨내고 세상을 보다 넓게 볼 수 있도록,
돈을 쓰지 않아도 즐거운 여행을 많이 다녀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지금 부자가 되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