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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숙 Dec 05. 2023

2046

2046*  


        

어느 날 나는 한 여자를 만났을 것이다 

검고 외로운 밤을 헤매며 너를 찾아다녔다

오랫동안 쓰면서 매만진 식탁보처럼 

그 마음 펼치는 동안 

나의 낡은 구두를 보며 말없이 웃던 여자는   

나를 맞아들이고 젖을 물려 잠을 재웠을 것이다 

메마르고 차가운 나의 손이 

조금씩 온기를 찾아가는 저녁이 되면 

우리는 밤나무 꽃가루 하얗게 뒤덮이는 

밤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자와 물고기처럼 새처럼 

실컷 살았을 것이다 

가장 먼 서쪽 나라까지 

약속의 말들이 온통 붉어지도록 

사랑하고 또 사랑했을 것이다 

문득 돌아보면 지천으로 펼쳐지는 

꽃과 나무의 계절 속에서  

여자에게 나는 첫 번째이자 두 번째 비밀이고 

비밀의 비밀이 되었을 것이다 

빗방울이 길 위에서 폭죽처럼 터지고 

구두가 다 젖도록 걸어  

그 신비가 해명되려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해야 하리라     




*2004년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 제목. <화양연화>에서 첸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눴던 차우, 그의 이야기는 한없이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그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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