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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May 19. 2024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여자 최은영의 개똥철학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저서 '존재와 시간'을 통해 인간은 우연히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자이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개별적인 존재'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고, 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실재 우리는 까마득한 기억 저 너머, 이번 생의 목적과 의미도 모른 채로 특정한 시대와 국가 그리고 부모의 영향력 아래 귀속된 삶을 살도록 '내던져진 존재'이기도 하다.


영문도 모른 채 생의 초년기를 주어진 환경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서 살아냈어야 하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삶의 지배적 영향력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이번 생의 하루하루를 생생하게 체험하며 살아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번 생이야 이처럼 어쩔 수 없이 영문도 모른 채로 내가 선택한 적 없는 환경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 던져진 채로 태어났을 뿐이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다음번에 한 번 더 태어나면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겠다 허락해 준다 가정해 보자.


그러한 가정 앞에 어떤 이가 감히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허구성을 내뿜고 있어, 묻고 답하는 그 과정에 진지한 논리적 사고의 개입이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질문을 받는 이로 하여금 막연히 기분 좋은 상상을 허용함으로써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고 가정하자.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하고 싶을까? 

몇 가지 대답을 가정해보려고 한다. 


예측컨데, 매우 많은 이들이 아래와 같은 답변을 하게 될 것 같다.

- "부잣집에서 사랑받는 강아지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 "미모와 재력을 갖춘 화려한 연예인으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이 시대 많은 이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외모'와 '재능', '부유함'을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마치 '마법의 도깨비방망이'처럼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인 냥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소수의 특정인들은 위의 답변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게, 이런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받았던 사랑을 돌려주고 싶어서요."

-"그냥 제 자신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건 어색하고 불편할 것 같아요."


위와 같은 답변을 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삶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라도 그 나름의 보이지 않는 가려진 고통이나 아픔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크게 부러워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경험했던 이번 생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이들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겠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는 말, 들어본 적 없으신가요?" 너무 많은 걸 포기하고 살았더니 저는

  다시 또 태어날 의지도 잃어버린 것 같네요."


이런 답변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뜻대로 어떤 성취를 이뤄낸 지 발견하기가 어렵고,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일궈낼 용기도 없으며 낯선 타인의 화려한 인생을 구경하는 도중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서 큰 좌절감을 맛본 적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 시대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는 여러 답변들 중 어떤 답변이 당신의 마음에는 가장 와닿는가???


만약에 누군가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또다시 태어날 의지조차 잃어버린 것처럼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 힘겨운 누군가 있다면,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행복 총량의 법칙'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누군가 행복을 수치화시켜 '행복 총량의 법칙'을 주제로 한 실증적 종단연구를 수행해 왔다고 가정한다면,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인종 불문 인간은 일생동안 느끼는 행복의 양은 정해져 있으며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졌다.'라는 명제가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과학적인 이론으로 정립할 수 있었을 거다. 


인생사를 전체로 두루 아울러 살핀다면, 모든 것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균형을 잡아가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곰곰이 생각해 보자. '가난'을 체험해 본 사람만이 '부유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체험하는 모든 것들은 (-) 음과 (+)양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상대값으로서 존재하여 체험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보자. 억만장자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한 여인이 있다. 그녀와 동시대에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억만장자 집안에 태어난 그 여인이 엄청난 부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누리는 부유함을 '부유함'으로 인식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태어나서부터 자연스럽게 당연히 누린 삶의 경험일 뿐이다. 그녀가 자신이 누리던 것들을 '부유함'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누리던 것보다 상대적으로 궁핍한 상태를 체험해 보아야 자신이 어린 시절 누리던 것들을 '부유함'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지금껏 살아온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그 어떤 '부족함이나 결핍'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불행'의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새로운 '풍요와 채워짐'의 상태를 체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조 단계에 머물고 있을 뿐인 것이다.


너무 빨리 스스로의 '현재' 느낌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 전체'로 과대 해석하며, 단정 지어버렸던 건 아닌지 그 부분에서만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 성찰해 보면 그만이다. 


'행복 총량의 법칙' 혹은 '인생 총량의 법칙'을 인식하고 있는 자에게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질문을 한다면 어떤 대답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매 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하며 소중하게 바라보려고 애쓸 겁니다."

-"어차피 모든 건 지금 이 순간에만 잠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걸 잘 알거든요."

-"지금 이 순간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만일 뿐이지요."


............. 아마도 이런 대답을 듣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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