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지구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나'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삶을 영위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대부분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지나온 삶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기억'과 '습성'을 토대로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설명할 줄 알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성격, 성향, 대인관계 유형 등을 타인과 구별 지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지금의 물리적인 현실 세계와 처음 접촉했던 아득한 옛 시절에 핏덩이였던 당신은 아직 '나'라는 스스로에 대한 고유한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 채로 태어났다.
맨 몸으로 이 지구상에 던져진 그때 그 시절, 우리 모두는 그저 '나'와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통합된 세계관을 인식의 전부로 갖고 있었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핏덩이 아기였던 당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곧 자기 자신과 같았고 내가 바라보는 이들의 감정이 곧 자신의 감정처럼 느껴졌다.
3살 이전의 기억은 거의 대부분이 무의식 저 너머로 깊숙하게 숨어들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그 시절의 기억들을 생생하게 의식 밖으로 꺼내어보는 결코 쉽지 않지만 말이다.
시간여행을 하며 과거 어느 시점, 서툰 우리말도 힘들어 옹알이를 하던 옛날 옛적 어린 아기였던 자기 자신으로 잠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와 '너'를 구분할 수 없다는 그 통합된 세계관의 인식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더 온몸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기는 할 테다.
'나'와 '남'이 구분이 되지 않던 그 옛날 옛적 아기였던 당신은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를 욕망해 본 적이 없다.
남들보다 더 나은 멋진 존재가 되고 싶다 거나, 남을 이겨주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들을 떠올리는 것 등은 모두 옹알이를 띄고 모국어를 통한 언어적 사고기능을 갖춘 이후에나 가능해진 것들이다.
그렇게 여러 후천적 학습과 사회화 과정을 통해 나와 남을 분리해서 인식할 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추구하게 되었고, 때로는 '나만을 위한 행복'과 '나만을 위한 삶'을 꿈꿔볼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당신은 그렇게 스스로가 살아온 인생이 그 누구도 아닌 당신 스스로를 위한 삶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의 이번 생이 나 스스로의 행복과 무관하게 가족 혹은 국가의 안녕을 위한 것으로 살아내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과연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은가? 명예롭고 자랑스럽기만 할 수 있을까?
가족과 조국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겠다만, 기왕이면 자기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를 누리며 개인으로서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받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이들이 훨씬 많을 거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우리 모두 각 개인에게는 "행복 추구권의 권리"가 있다고들 믿고 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이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가 계급 신분제 사회를 살아가고 있었으며 '인권'과 '개인의 사적 권리 추구'를 공적인 가치로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떠올리면 '개인으로서의 사적 행복 추구권'은 지금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100여 년 전 인류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이 누리고 사는 특수한 권한이 아닐까 싶다.
과거와는 달라진 지금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각 개인은 그만큼 더 '사적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을까? 많은 이들이 가족이나 타인, 국가를 위하는 삶보다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행복 추구를 더 가치 있게 여기며 사는 시대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과거에 비해 '더 불행한 개인'이 많아진 것 같기도 하다.
학창 시절에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교육받았고, 주변에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듯 보이는 타인들'만 잔뜩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자기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지면 그만큼의 상대적 박탈감이 크게 느껴지는 거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이 시대에 왜 나의 삶은 행복하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은 격심한 상대적 '불행감'으로 연쇄반응을 일으켜, 격심한 감정의 쓰나미가 몰아치는 현상을 낳는다.
도리어 '개인의 사적 행복 추구권'을 인식하면 할수록, 내 삶이 행복하지 않은 것 같은 불행감을 느끼게 되는 아이러니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사실 '개인'과 '가족 및 내 주변인'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국가'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 끈끈한 유기체적 시스템일 뿐이다. 따라서 오직 '나 자신, 개인'만을 위하며 살아가는 삶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나의 삶은 가족의 삶 안에 포함된 일부이며, 내 가족의 삶은 내가 속한 국가 조직의 일부이기도 하니말이다.
어느 누구도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이 들 때까지 '오직 나 자신을 위하는 삶'을 살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품고 살아가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 자기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 세계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뿐인 거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가 문득 스스로의 인생 전체를 반추할 기회가 생기면 그때 한 번 '나의 인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뒤돌아 곱씹어 생각해 보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가족과 학교, 회사와 국가 등 크고 작은 조직의 일부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나가다가 때로는 '사회적 역할'과 무관한 '개인의 사적 취향과 유희'를 탐색하며 누리기도 한다.
당신이 만약 '내가 살아온 삶이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것만 같아서 불행하고 서글퍼지곤 한다면, 지금껏 살아낸 시간 속에 무던히 애쓰고 노력해 온 당신을 대견하게 여겨보자고 말해주고 싶다.
'나 자신을 위한 삶'이란 특별하게 화려한 삶의 성공을 일궈낸 이들이 누리는 것들이 결코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한 삶'이란 그저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이 원하 것'에 관심을 가져주고 '나 자신을 위해주는 마음'을 실천하는 삶이다.
나 자신을 위해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어주고, 나 자신을 위해 좋은 글귀를 읽어주고, 나 자신을 위해 따뜻한 햇살의 광합성을 해주고, 나 자신을 위해 편안한 휴식을 취해주는 것들 말이다.
나를 위한 삶을 살아내지 못한 것처럼 서글퍼지곤 하는 이들은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한 일상의 작은 행위들을 실천하지 못한 채 과도한 사회적 책무에 자기 삶을 압도당한 채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온전하게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이란 그저 허구일 뿐이다.
온전하게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사는 것처럼, 자기 만족감이 넘치게 보이는 누군가가 있다고 한들 그건 잠시 당신의 눈에 그 사람의 모습이 그렇게 보였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열심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놓고서는 내 시간과 노력이 온통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 타인의 시선, 가족의 기대에 따라 좌지우지된 것만 같아서 억울하고 허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세상의 기준, 타인의 시선, 가족의 기대'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말이다. 당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삶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우리 각 개인이 속한 세상의 굴레에서 편안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며 하루하루 흘러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만약에 당신이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내길 원한다면, 과거 지난날 힘들고 지치던 고난과 괴로움 속에서도 묵묵히 지금까지 버티며 견뎌낸 자기 자신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안아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당신 자신을 위해주는 가장 중요하고도 우선순위의 방식이다.
세상의 기준, 타인의 시선,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과도하게 몸부림치며 노력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어리석었다고 비웃지 마라. 자책하지 마라. 당신의 지나온 시간들은 모두 다 그 나름의 소중한 가치가 있었으니 말이다. 다시 시간을 과거로 되돌린다 한들 그때 그 시점에는 당신의 선택이 최선이었을 테니 자꾸만 과거를 곱씹으며 후회하지 마라.
당신 스스로의 행복을 위한 삶을 살아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오늘 하루, 나를 위해주는 마음으로 나 스스로를 따뜻하게 대해주자. 따뜻한 물로 샤워하며 스스로에게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대견해.' 그렇게 말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