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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May 26. 2024

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여자, 최은영의 개똥철학


당신은 매일 아침잠에서 깨어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가?


대부분의 건강한 이들은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자기 신체의 안녕함을 확인하고, 당장 눈앞에 주어진 오늘 하루동안 현존하는 존재로서 살아내기 위해서 '시간 감각을 일깨우는 일들'을 한다. 


아침의 평범한 일과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밤 사이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당신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침대 구석에 놓인 스마트폰을 찾아서 '지금 이 순간'의 시각이 몇 시인지 확인을 한다.

당신의 뇌는 정확한 숫자로 현재 시각을 확인함과 동시에, 예정된 일과를 떠올리며 지금 당장 잠시나마 여유를 부려도 될지 아니면 서둘러야 할지 무의식적인 자동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시간감각을 깨우고 나면 몸의 감각도 일깨워야 한다.

자고 일어났는데, 혹여나 몸의 감각이 개운하지 않고 무겁거나 뻐근한 느낌이 들었을 경우에는 나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거나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신체리듬을 워밍업 시키고 있을 거다.

또 어떤 이들은 신체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일깨우기 위해 모닝커피를 찾아 마시기도 할 테고 말이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 다시 현실세계에 살아있음을 만끽한 당신은 이제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차례에 존재하게 된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밤 사이 피부 위로 소복이 올라온 기름 떼를 세숫비누로 벗겨내고 난 후, 왠지 모를 개운함을 느끼며 거울 위에 비추어진 자신의 눈빛을 마주하게 된 순간을 떠올려보자.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당신은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


밤 사이 얼굴이 부워올라 못생겨진 것 같아, 어젯밤 야식을 먹었던 자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

아니면, 머리숱은 적어지고 흰머리가 늘어나는 걸 목격하며 나이 듦에 대한 씁쓸함을 느끼게 될까?


매일 아침마다 우리는 타인에게 보여주기에는 조금 어색한 '자연인 그대로의 민낯을 한 내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주었을까?


혹여나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내 나이가 몇인데 부끄럽고 새삼스럽게 자기 모습을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가 있겠어?'라는 생각이 떠올리는 이들도 많을 테다.

만약에 당신 역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면, 한번 가볍게 다음 질문을 연이어 묻고 싶다.


"그렇다면, 20대의 당신으로 그 기억을 되돌려도 좋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며 꾸며지지 않은 당신 자신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봐 준 기억이 있으신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와 같은 질문에 쭈뼛거리며 특별히 그런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대부분 많은 이들은 꾸며지지 않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태도에 익숙하지 못하다. 어쩌면 좀 더 사랑스러워 보일 수 없는 자기 자신의 현실에 낙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꾸며지지 않은 민낯의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어색하고 낯부끄러운 현상인 것처럼 느끼는 우리는 나 아닌 또 다른 대상이나 장면, 사물을 관찰하다가 우연히 사랑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분명 지금껏 살면서, 길을 걷다가 만난 길 고양이나 총총거리며 걷는 꼬마 새를 바라보며 사랑스러운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 거다. 혹은 때때로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는 어린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사랑스러운 감정을 느꼈을지 모른다.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나 아닌 어떤 외부 대상에게 우연히 순간적인 사랑스러움의 감정을 느낀다.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데는 어떠한 의도적 노력이 필요한 게 절대로 아니다. 몸을 통해 자연스럽게 특정한 장면을 마주하며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기 자신보다 길 위에서 마주한 동식물과 낯선 아기의 존재를 나 스스로의 존재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나 자신보다 중요한 존재는 없다며, 이성적 사고로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정의 내리면서도 감정적으로 그 소중함을 느껴주기가 어렵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사랑스러운 감정으로서 느껴주기가 어려운 것일까?

자기 자신을 정원 위에 피어난 포기 꽃을 바라보듯이 무심하게 관조적으로 바라볼 없기 때문이 아닐까?


무심하게 관조적으로 바라본다는 게 무슨 뜻일까?

그 어떤 의도나 목적이 없이 텅 빈 마음으로 고요하게 지긋이 바라봐주는 걸 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애 주기별로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의도를 품은 채로 노력하며 살아가야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자기 존재를 두고 끊임없이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었는지 판단을 해야 하니, 무심하게 관조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판단'을 해야 하는 순간부터 무심한 관조적 차원의 관찰'은 불가능해지고야 만다.


상상해 보자. 의도나 목적이 없는 산책길에서 마주한 동식물을 마주할 때 당신은 가장 순수한 감정으로서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애써 노력하지 않더라도, 당신 스스로의 자연적 본성으로 내재되어 있는 사랑스러움의 감정은 불현듯 무심코 솟아오를 수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만약에 누군가 당신에게 오늘 산책길에서 마주한 꽃들 중 가장 예쁜 꽃이 무엇인지 선별하여 기록해서 가져오라는 숙제를 내어주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어떤 꽃이 더 예쁜 꽃인지 분별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감정적 여유는 찾기가 어려워지고 말이다.


당신은 자기 스스로의 존재가 '사랑받아 마땅한 귀중한 존재'라고 믿어줄 수 있는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자기 존재의 사랑스러움을 느껴주고 알아차려주려면, 자기 자신을 화사한 햇볕이 비추는 정원 위에 피어있는 꽃송이 바라보듯 무심하게 바라봐주어야 하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것은 결코 특별한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깨어있는 당신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스스로의 '살아있음'으로서 느껴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생명체보다 나의 존재가 더 많이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었는지 분별하거나 판단함이 없이 관조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바라봐준다는 것이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새소리의 지저귐과 세상을 밝혀주는 환한 햇살 그리고 밤하늘의 빛나는 별까지 모두 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바라보고 느껴줄 수 있는 것들 아닐까?


당신은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성을 띈 생명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판에 피어난 각양각색의 꽃과 풀처럼 그저 생겨난 그 모습 그대로 생명력을 빛내고 있는 아름다운 존재일 뿐이다.


길 위에서 만난 갸녀린 총총새 한 마리를 바라보듯, 당신 자신의 연약함마저도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보듬어주었으면 한다.

그러한 눈빛으로 나 스스로를 바라봐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나 스스로를 사랑해 줄 수 있다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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