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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시국: 때론 포기하는 게 편하다.

Recharge 13일 차: 이탈리아 피렌체 > 로마 > 바티칸 시국

by Chuchu Pie

13일 차 하이라이트

피렌체에서 기차로 로마에 도착해 새로운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바티칸 시국 (Vatican City)으로 향했다. 바티칸 박물관 및 성 베드로 대성당 투어를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피렌체 두오모 투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 기대는 시작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선, 바티칸 시국 입구에 도착하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다. 한 곳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투어니까 일단 들어가면 좀 편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 예상도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만다. 사람이 너무 많아 전시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알고 보니 하루에 약 4만 5천 명이 방문하고 있고 그 기록도 연일 경신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35도를 웃도는 날씨가 에어컨도 없는 무방비 상태의 바티칸 박물관을 신나게 달궈 놓아, 걷는 내내 거대한 사우나를 여행하는 느낌이었다.


이탈리아 남자인 우리 투어 가이드는 피렌체의 나탈리아와는 달리 형편없었다. 별 설명도 없이 그냥 지나치기 일쑤고, 무슨 말을 해도 웅얼거려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나마 들어보면 알맹이 없는, 옆에 다 쓰여 있는 이야기만 잠시 해 준다. 사진 찍기도 어렵고 감상도 어렵고 무슨 말인지 들리지도 않는데 사람은 엄청나게 많고 날씨는 푹푹 찌는 이 박물관 지옥.


어쩔 수 없이 그냥 다 내려놓고 사람 감상이나 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언제 또 올 기회가 있겠지, 란 말로 위로했다. 그렇게, 전시품보다는 사람들이나 찍고 관찰하며 다녔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 먹으니 나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나도 덥지만 옷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묵묵히 계단을 오르는 사람을 보며 안됐다는 생각도 하고, 뭔가를 멋진 각도로 사진에 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을 보며 마음으로 박수도 쳐준다. 어떤 이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고 어떤 이들은 그 난리 통에도 서로 장난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의도치 않게 서로 밀착되다 보니, 평소에는 그 정도로 가까이서 볼 일 없을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피부 생김새와 냄새도 자세히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바티칸을 보러 왔지만, 바티칸을 매개로 하고 세계인 구경이나 실컷 하게 됐다.


있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더니, 바티칸 투어도 그 나름대로 기억에 남는다. 보고 싶은 것으로 꽉꽉 채워도 부족할 것 같은 소중한 여행이지만, 이럴 땐 오히려 포기하고 나니 편해졌다.


원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지만, 원했던 것을 버리니 그 자리를 새로운 즐거움이 채워 줬다.


..라고 위로했다.

오른쪽 깃발이 우리 게으른 가이드이다.
사람이 주인공이고 몇 백년의 역사를 가진 작품들이 배경이 되었다.




13일 차 여행 일지

아침

바티칸 시국도 상당히 고역이었지만, 사실 이 날 가장 힘든 일은 아침에 기차역에서 벌어졌다. 내가 기차 여행과는 안 맞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어리버리함을 적나라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선 전적이 안 좋다. 파리에서 기차를 놓칠 뻔한 것이 불과 일주일 전, 이틀 전 베네치아를 갈 때는 틀린 역에서 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일찍 나왔다. 아직 비어 있는 플랫폼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에스프레소를 들이켜는 차가운 도시의 기차남. 바로 내가 그리던 모습이다. 아침 10시 31분 기차이기 때문에 이른 새벽부터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역까지도 전날 미리 걸어 보고 정확히 6분 걸리는 것을 확인했다. 9시 45분에 짐을 내리고 체크아웃을 마쳤다.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


역에 도착하고 유레일 패스를 입구 직원에게 보여주고 탑승 준비를 마쳤다. 이렇게 기차가 도착하지 않아 비어 있는 플랫폼에서 여유를 가져본 것이 얼마 만인가. 모든 것은 순조로워 보였다. 그런데 전광판에 우리가 타야 할 기차 번호가 안 보인다. 10시 31분 발 기차도 없다. 전광판에 표시되기엔 너무 이른 시각인가 싶었지만 오히려 11시 발 기차는 표시가 되어있다. 영문을 알지는 못했지만, '뭐 괜찮겠지' 하고 억지로 마음을 놓으려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부랴부랴 종이 유레일 패스를 들춰봤지만 거기에는 별 정보가 없다. 유레일 사이트에 들어가 다시 한번 살폈다. 그제야 우리가 갔어야 할 기차역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Firenze S.M.N. 역이 아니고 Firenze Campo Di Marte 역이라는 걸 발견한다.


아.


짧은 탄식에 앞이 깜깜해지고 식은땀이 흐른다. 가족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기차표를 바꿀 생각으로 매표소로 향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다. 게다가 매표소 직원들이 대체로 얼마나 느린지 기억해냈다. 그냥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이 멎었다.


도대체 캄포 디 어쩌고 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구글 지도를 꺼내 살펴봤다. 자동차로 12분이면 간다고 나온다. 그렇게 멀지는 않구나! 시계를 보니 10시 15분이다. 기차 출발 시각까지 16분. 택시를 빨리 잡을 수 있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겠다 싶었다. 다시 희망을 품었다. 그 길로 발걸음을 돌려 가족에게 돌아왔다.


가자.


단 한 마디만 던지고는 그대로 트렁크들을 챙겨 갈길을 재촉하는 나의 뒤로, 영문을 모르는 두 딸과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단 따라나선다. '이 기차역이 아니었어.' 이 한 마디 설명에 아내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밖으로 나오니 다행히 택시가 있다. 그렇게 달려가 양손에 든 큰 드렁크를 던지듯이 택시에 짐을 실었다. 캄포 디 마르테 역, 10시 31분! 다급한 나머지 우리 기차가 몇 시인지 외쳤다. 날카로운 몸매에 양팔에 문신이 가득하고 온몸에 담배 냄새가 진득한 택시 기사의 눈빛이 순간 번쩍거린다.


그렇게 미션 임파서블의 격렬한 추격전처럼 달려 불과 7분 정도만에 도착했다. 12유로 좀 넘게 나왔는데 15유로를 주고, 거스름돈은 가지세요!라고 외쳤다. 날카로운 몸매에 양팔에 문신이 가득하고 온몸에 담배 냄새가 진득한 택시 기사가 씩 하고 웃는다.


그 의외로 귀여운 미소를 뒤로 한 채, 30 킬로에 육박하는 트렁크를 하나씩 들고뛰었다. 전광판에 우리 기차 번호가 눈에 띈다. 10시 31분 발 기차라고도 쓰여 있다. 그렇게 달려가 마침내 기차에 오르니,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마치 우리만을 기다렸다는 듯 기차 문이 닫힌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미리 타 있던 손님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깊이 반성했다.


점심

로마 테르미니(Termini) 역에 내려서는 우버를 이용했다. 기진맥진해 도저히 대중교통을 이용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우버는 택시와 요금이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오후

그렇게 얼마 안 있어 이어진 바티칸 시국 관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표정으로는 거짓말 못하는 둘째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이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솔직히 이것을 그가 고작 24살일 때 조각해냈다는 사실이 더 기막혔다.


조각이 완성되고 화제가 되었지만 엉뚱한 사람이 조각한 것으로 사람들이 오해하자 밤에 몰래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는 일화 등 얽혀 있는 이야기도 많다. 그중에서도, 성모 마리아가 예수보다 더 돋보여 주인공 같다는 비판에 그가 "인간의 시선으로 평가하지 말라"라는 짧은 말만 남겼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람들은 그 진의를 이해하게 된다. 인간의 시선 (정면)이 아니라 신의 시선 (위에서 봤을 때)에서 보면 누가 봐도 예수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및 내용 출처: 올댓아트 블로그)


그 외에도 건질 사진은 몇 가지 있었다. 유명한 <천지창조>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몰래 촬영에 성공해내는 아시아인을 목격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 "나 사진 찍었어." 한국인이었구나. 누군가 봤을까 내 가슴이 다 조마조마하다.


저녁

저녁은 호텔 근처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Rione XIV라는 음식점으로 정했다. 구글 평점이 4.8, Trip Advisor에서는 무려 5점 만점에 5점이다. 평가 인원도 600명 가까이 된다. 로마에서 두 번째로 좋은 레스토랑에 오른 적도 있다고 하니 기대됐다. 오픈 시각인 7시 정각에 맞춰 왔는데 우리가 두 번째 손님이었다. 돌이켜 보니 운이 좋았다. 나머지 테이블은 이미 다 예약이 된 상태였고, 우리가 자리 잡은 후 불과 10분 동안 최소한 다섯 그룹이 예약이 없어 돌아가야 했다.


맛은...


로마가 아니라 이번 유럽 여행 통틀어 최고였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손님이 오면 안내하고 주문을 받는 여자분이 굉장히 상냥했다. 눈동자가 유독 깊고 짙은 검은색인 데다가 통통한 볼 위에 보조개를 살짝 얹은 귀여운 얼굴이었다. 말을 꺼낼 때마다 눈웃음을 지었는데, 그 얼굴이 보고 싶어 자꾸 주문을 하게끔 하는 마력이 있었다.


손님의 식사가 끝난 뒤처리와 계산은 그 남편이 맡았는데, 한눈에 봐도 아주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은 많이 안 하지만 손짓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사려 깊었다. 우리가 고맙다고 말해주거나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해주면, 미스코리아가 인사하듯 무릎을 살짝 굽히며 즐거워했다.

대략 이런 식으로.


가만히 지켜보니 남편이 어디선가 어리버리하고 있으면, 눈웃음 귀여운 언니의 눈빛이 번득거렸다. 손님이 무언가 질문을 했는데 잘 모르겠으면 남편이 아내에게 조르르 달려가 물어보기도 한다. 귀엽지만 강단 있는 여주인과 너무 선하지만 어딘가 어리숙한 남편이, 딱 이탈리아 판 이효리 이상순 부부 같았다.

왼쪽에서 주문 받는 사람이 이탈리아 판 이효리 씨.


너무 인상 깊어 다음 날 저녁도 예약을 하려니, 불가능하단다. 저녁 식사는 금요일과 토요일만 하고 나머지는 점심 식사 때만 영업하기 때문이다. 식당 주인인 부모님께서 주방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너무 힘들어 그렇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 식당의 음식은 이탈리아 사람 부모님의 정성이 담긴 전통 이탈리아 음식이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할머니 밥상 같은 것. 훌륭했던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 퀄리티면 프랜차이즈로 만들어 해외에 진출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슬쩍 얘기를 꺼내볼까 했지만 그만뒀다. 그러기엔 분위기와 와인에 너무 취해 있었다.


대충 계산해보니 세후 약 월 8,000유로 정도의 순수익을 네 가족이 나눌 것 같았다. 크게 욕심 내지 않고 삶과 일의 균형을 적절히 맞춰 살아가는 것 같은 모습이 훈훈했다.


뭔가 사연 있어 보이는 'Rione XIV'라는 이름도 알고 보면 정말 무심한 이름이다. 'Rione'이 'District' 즉, 한국으로 치면 '동' 정도에 해당하고, 음식점이 위치한 동네가 바로 Rione XIV Borgo였다. 이를테면 방배 3동에 '방배 3동'이라는 음식점을 차린 것이다. 그런 무심함이 오히려 이 레스토랑의 매력을 배가 시키는 것 같다.

Rione XIV에서 힐링하고 나오니 다사다난 했던 하루가 잊혀지고 좋은 기억만 남았다. 훈훈하고 맛있는 음식점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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