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인턴 나부랭이, 스카웃 제의를 받다!
나는 다시 구직활동을 했다. 여기저기에 서류 지원하고 면접을 보면서 다소 창피하긴 하지만, 면접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시행착오들을 겪어봤다. 우선 S여성회관에서는 2명의 면접관과 함께 면접을 보았는데, 넘치는 열정과 패기로 내가 면접관에게 질문도 하면서 면접관을 압도하고 말았다. 취업교육을 받을 당시, 열정과 의욕이 대단했던 나에게 강사님이 절대 면접관을 압도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 그 예상은 적중했던 것이다.
G여성인력개발센터의 면접은 하필 G여성비전센터 회식 다음 날이었다. 퇴사 기념과 연말회식을 겸해서 참석했던 나는 오랜만의 회식자리에 들떠 있었다. 대학졸업 이후 결혼생활과 육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주문화와 멀어져 있었고, 생맥주 피처에 소주 한 병을 통째로 부어서 따라주던 소맥을 처음 경험했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컬처쇼크(culture shock)였다. 음주량 조절을 못한 나는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도저히 앉아있거나 입을 벌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행여나 안되면 말자는 생각으로 기관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몸이 너무 안 좋으니 시간대를 바꿔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다행히 오전 첫 타임 면접조에서 오후 타임 마지막 면접조로 변경해 주셨다. 다행히 오후쯤 되니, 나는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채로 겨우 몸만 가누고 앉아,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여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본 이제까지의 면접 중 가장 차분하고 힘이 없는 면접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탈락이었다. 나는 끝내 30대 1의 경쟁률을 통과하지 못했다.
S고용센터에서는 확실히 면접은 잘 보았는데, 이 날도 문제가 발생했다. 전날 준비해놓은 면접전 제출서류가 당일 출발하려는 데 분실된 것이었다. 정말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안 보이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서류 준비가 안되었으니 면접을 포기해야 하나, 면접시간에 늦더라도 서류를 재발급하여 가져가야 하나 정말 고민이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내가 결정하는 것 보다는 기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기로 하였다. 전화를 걸어 자조치종을 설명하니 다행히 담당자는 서류는 합격후에 제출해도 되니 일단 늦지않게 면접장에 도착하는 것이 좋겠다고 안내해주었다. 결국 나는 무사히 면접장에 도착하였고 면접을 볼 수 있었다.
5명의 면접관 중 가운데에 계신 분이 제일 높아 보이셨는데, 특히 그 면접관이 나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다. 만약 합격한다면, 내가 지원한 분야가 아닌 기업지원 파트에서 근무해 볼 의향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지만, 기분 상하시지 않게 그렇지만 나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물론 나는 어느 파트에서든 채용이 되어 직업상담사로서 근무하고 싶지만, 기왕이면 제가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취업지원 파트’에서 먼저 근무해보고 싶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며칠 후 합격하여 고용센터에 첫 출근한 날이었다. 어디선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본인은 G일자리센터의 차장이라고 소개했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한 인턴을 채용하고 싶은데, 내가 직전에 면접 보았던 G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추천을 받아 내게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G일자리센터는 어떤 곳인지,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주로 어떤 일을 맡게 되는지 설명을 해주셨다. 왠지 내게는 고용센터에서의 업무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고 내게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짧게 고민한 후에, 고용센터 담당자에게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고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직장을 결정했다.
예상대로 G일자리센터에서의 근무환경은 좋았다. 집에서도 가깝고, 함께 일하는 팀장님, 차장님도 너그럽고 좋은 분들이셨다. 나의 직속상관이자 사수였던 O주사님은 1세대 직업상담사로서 능력과 열정이 느껴지는, 게다가 인품도 있는 직업상담사 1호 계약직공무원이셨다. 게다가 나는 혼자 입사한 게 아니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아이 셋이 있고, 사는 곳도 가까운 입사동기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의지하면서 일도 자연스럽게 분담해서 할 수 있었다.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나는 O주사님의 업무를 돕기 위해, 회계경력이 있는 내 동기는 차장님의 업무를 돕기 위해 채용된 사람들이었다. 또 직업상담사 인턴으로서 일자리센터에서 하는 공통적인 취업지원 업무들에 대해서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주사님과 함께 '제대군인사업' 위탁기관 선정을 위한 서류심사나 평가준비를 돕기도 했고, 새롭게 추진하는 '행복한 일자리 사업'을 기획하기도 했다. 일은 일대로 재밌게 배우면서 점심 먹은 후에는 팀원들과 다 함께 가까운 인근 산길을 산책하는 시간도 굉장히 좋았다.
그렇게 좋은 인프라와 여건 속에서 재미있고 안락하게 한 달쯤 일했을 때였다. 센터에는 우리 두 명의 인턴 외에, 광역일자리센터로서 구직자들의 상담과 알선, 각종 교육이나 프로그램 등을 담당하던 직업상담사 선생님들이 다섯 분 계셨었다. 우리는 그분들의 지원업무도 하고 있었는데, 그분들 중 한 분이 나를 또 다른 센터의 직업상담사 채용에 추천을 해주신 것이었다.
H일자리센터 K팀장님은 내가 일하는 센터까지 직접 찾아오셨다. 이제 겨우 인턴나부랭이인 내게 찾아온, 첫 스카웃 제의였다. 내가 예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현재는 무슨 업무를 하고 있는지 등 자세히 물으셨다. 내가 분야와 대상은 전혀 다르지만 중학생들이나 아동 대상 수업을 했던 경력에 대해서도 반가워하셨고, 강의를 맡기면 해보고 싶냐는 질문도 하셨다. 그러면서 내 연봉 책정에 1년 정도의 강의경력을 인정해 주시기로 하셨다. 또 H시는 땅은 넓고 인구는 동쪽에 몰려있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서남부권에 몰려있어 만성적인 구인난과 취업지원의 어려움이 많은 도시라고 하셨다. 대신 고생스럽긴 하지만, 내가 직업상담사로서 경험해보고 싶은 상담과 알선, 강의, 행사 진행 등 다양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곳임을 알려주셨다.
한 마디로 나에게는 도전적인 비전이었다! 거대한 파도가 나를 향해 밀려오며 압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현재의 이 안전하고 안락한 호수에서 머물 것인가? 바다에 돛을 달고 온몸으로 폭풍우와 파도를 겪으며, 더 넓고 거친 바다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집에 있는 어린 삼 남매를 생각하면 이 안전지대에 더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다.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인프라 시설도 너무 좋고 스트레스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오랫동안 이 안전지대에 머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안락함이 주는 달콤함에, 평온함에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지고 길들여지면, 나의 모험심과 도전정신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모든 걸 새롭게 배우고 길을 떠나야 하는 시기였다. ‘직업상담사’란 불모지를 향해서,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일과 그 일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들이 있을 텐데... 그걸 얻고 성취하려면, 고생스럽고 일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왠지 그곳에 가면 고생길이 훤히 열릴 것 같다는 생각, 그렇지만 그곳에 가면 그 누구보다, 그 어느 곳에서보다 일을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나는 짧은 한 달 반의 인턴 경험을 마치고, 다시 나의 세 번째 직장을 향해 돛을 올리기로 했다!
<에필로그>
지난 여름 열병을 앓듯이 썼던 17편의 짤막한 글들을 묶었습니다. 사실은 더 일찌감치 완결을 했지만... 혹시라도 달라진 나의 생각에 고치고 싶은 생각이 들까봐, 차마 발행하지 못한 채 서랍에 고이 모셔놓고 있었습니다. 이제 흩어져있던 스토리들을 모아 <브런치북>으로 엮어 발행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임신과 출산, 육아의 이유로 경력이 단절되었던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고민하고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들, 결국엔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 끝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직업상담사라는 직업을 찾아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기록한 글입니다!
이 글은 작가의 이야기 이지만, 결국 누군가의 엄마의 이야기이고, 누군가의 아내의 이야기이고, 또 누군가의 딸이거나 며느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여성들과 아이들과 남편들이 함께 읽기를 희망하며, 오늘도 가정과 일터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여러분들을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 작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