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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줍음 Aug 13. 2023

첫 직장, 내 인생에 가장 비참했던 날

세상을 향한 세 번째 도전_ 3번째 이야기

<15> 첫 직장, 내 인생에 가장 비참했던 날


2010년 10월,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한 학원에서 컴퓨터활용능력과정을 수강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G여성비전센터에서 학원으로 추천의뢰를 했고, 이제 막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한 동기들 중, 내가 추천을 받았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지참하여 내 상사가 될 차기 주무관님과 단둘이 면담 같은 면접을 봤다. 다행히 합격하였고 10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두 달간 일하게 되었다.      


직업상담사로서 나의 첫 일자리였고, 너무나 설레고 기뻤다. 페이는 적었지만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G여성가족지원재단의 예산으로 일당 3만원을 받고 G여성비전센터에서 근무하는 프로보노였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1시간 늦게 출근하고 1시간 빨리 퇴근하는 조건이어서 아이들 셋 키우는 엄마에게는 괜찮은 조건이었다. 한 달 20일을 출근하여 월 60만 원을 받았다. 요즘 아르바이트생들은 주 14시간만 일하면 벌 수 있는 돈을, 나는 무려 한 달을 출근하여 벌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더 컸기에, 나에게 돈의 액수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전임자가 동센터 여성새로일하기센터 취업설계사로 이직하면서 그 후임자로 채용된 것이었다. 내 업무는 ‘지역맞춤형 일자리창출사업’의 일환이었던 ‘스마트폰앱스토어 개발자 양성과정’의 운영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스마트폰 일상화 이후 무수히 많은 앱이 개발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국가나 지자체가 정책적으로 추진하던 신규 일자리 사업 같은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교육과정 운영담당자로서 교육생들의 출결 관리와 원활하게 수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업무는 난이도가 높거나 많은 편이 아니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기도 멋쩍었고 같은 사무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바쁜 사람들을 보면 다가가 도울 일이 있으면 시켜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뭘 알아야 돕든지 말든지 할 것이었다. 그러다가 복합기 옆에 놓고 쓰던 이면지 뒷면을 보게 되었다. 이면지를 보면 사무실에서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현재 진척도는 어느 정도인지 다 파악할 수가 있었다.  

    

적당히 기회를 봐서 바빠 보이는 주무관이나 주사님에게 다가가 간단한 업무 등을 도왔다. 또 담당자가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경우에는 전화를 대신 받아주거나 메모를 남겨두기도 했다. 당시 센터에서는 경기도 시군에 있는 수십 개의 평생교육기관의 담당자들을 초대하는 큰 워크숍 행사를 앞두고 있었는데, 해당 기관에 일일이 전화를 하여 참석여부와 참여인원을 파악해야 했다. 당시 중요한 업무라고 인식했고, 나는 성심을 다해 꼼꼼히 임한 결과 나 스스로도 꽤 유능감을 느끼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첫 직장에서 좋은 추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그곳에서 잊을 수 없는 ‘인생 최악의 베스트 3’ 안에 드는 경험을 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날이었다. 오후 4시경, 갑자기 상사가 나가면서 업무를 지시했다. 다음날 아침에 중요한 교육과정이 진행될 예정인데, 스프링노트형 교재를 30매 제작해 놓으라는 지시였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지만. ‘설마 1시간 안에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이니까 지금 시키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경력단절여성으로 업무 경험도 없었고, 사무실 환경도 낯설어서 그렇게 업무지시를 받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일머리도 없이, 의욕만 가득했던 나는 몇십 페이지가 되는 교안 뭉치를 복합기 트레이에 올려놓고 복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번에 복사가 되었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때 당시 복합기 상태는 문제가 있었다. 인쇄물은 불과 몇 페이지 나오지도 않아서 걸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지 못했던 나는 교안을 차곡차곡 다시 간추리고 복사기의 유리면을 깨끗이 닦아준 후 다시 복사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또 다른 페이지에서 걸려서 멈추었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고 침착함을 애써 유지하며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다. 페이지도 없는 문서를 식별하기 위해 어느 부분까지 몇 장이 나오고, 어느 부분부터 걸렸는지 페이지 첫 글자와 그림으로 표시하며 기록하기 시작했다.  

   

두서없는 인쇄물이 내 책상 한가득 쌓이기 시작했다. 거의 공황 상태가 된 나는 퇴근 시간을 넘겨 집에 전화를 걸었다. 감기에 걸린 셋째가 며칠째 항생제를 복용하고 있었기에, 그날 저녁 이비인후과에 예약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당시 남편은 아침 7시 반에 출근하여 밤 10시, 11시 무렵 귀가할 때까지 연락이 잘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야근하고 술까지 마시면 새벽 1시가 넘는 게 일상이었고, 심하면 새벽 3시, 5시가 넘어서도 들어왔다. 남편의 회사생활은 셋째 출산 1주일 전까지도 그런 식이었기에 남편의 도움은 바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당시 11살이던 큰딸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대신 동생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평소 익숙하게 다니던 이비인후과였기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내 일을 수습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끝내 수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복사해 놓은 인쇄물들은 내 책상으로도 모자라 공용 테이블에까지 펼쳐놓고 페이지마다 장수를 세면서 짝을 맞춰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밤을 새도 끝낼 수가 없는 지경이었고 나는 거의 패틱상태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천만다행인 것이, 그 날은 전임자가 나를 살렸다. 전임자는 마침 야근을 위해 저녁 먹으러 나가다가 내 모습을 본 것이었다. 저녁 먹고 와서도 여전히 있는 나를 보았고, 내가 거의 패닉상태에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전임자는 본인이 알아서 수습을 해줄 터이니 어서 집에 가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내가 여태 몇 시간 동안 세고 또 세었던 인쇄물들을 죄다 끌어모아 통째로 휴지통에 버렸다. 내가 종이 아깝다며 어쩔 줄 몰라하자, ‘이거 버리고 새로 출력해서 하는 게 훨씬 빠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줬다. 애초에 일을 이렇게 시킨 그 상사가 못된 사람이라고 했다. 맨날 자기 일하느라 바쁜 척하다가, 일을 시킬 때는 임박해서 시킨다고 했다. 복합기도 맨날 씹혀서 말썽인 걸 뻔히 알면서도 파일을 안 주고 종이 다발을 준 것부터 잘못이라고 했다. 문서 파일에 인쇄 명령을 내리면 쉽게 출력할 수 있고, 중간에 걸리더라도 몇 페이지에서 걸렸는지 확인할 수 있는데. 자기 귀찮으니까, 자기 편한 방식으로 일을 시켜서 꼭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킨다고 했다.

      

자기가 파일을 받아서 처리하면 금방 끝낼 수 있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집에 가보라고 했다. 나는 너무나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리고 정말 비참하고, 참담했다. 대학 나오고 나이도 서른여섯이나 먹은 사람이, 겨우 이런 사소한 일도 못 해내는 나 자신이, 너무너무 무능하게 느껴졌다. ‘집안에서 애 키우고 살림하던 애 엄마라서, 변변하게 일한 경력도 없는 경력단절여성이라서 역시 안된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 자신이 너무너무 비참하고 자존심 상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 날의 이 기억은 오래도록, 지금까지도 트라우마처럼 남았다.


저녁 8시가 넘어 퇴근을 하는 데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비내리는 밤길을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걸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자존심 상하고 비참해서, 주변은 신경도 안 쓰였다. 그렇게 그날은 '내 인생 최악의 날'로 기록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들과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그날의 가슴 쓰라렸던 기억을 회고하던 내게 큰딸이 말했다.     

 

“엄마, 그날은 나에게도 인생 최악의 날이었어요.  날 막내 태우고 유모차를 밀면서 간신히 우산 쓰고 오는 데... 그날따라 비바람이 몰아쳐서 우산은 날아가고, 유모차 덮개는 뒤집어지고, S는 비 맞고... 그날은 정말 나에게도, 최악의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큰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와 똑같은 날을 가장 비참한 날로 기억하고 있다는 말에 정말 깜짝 놀랐다. 나는 쓰라린 상처에 또 한 번 가슴이 후벼 파이는 아픔을 느끼며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Y야. 엄마가 그날 너무 비참하고 속상한 날이어서, 미처 너를 돌보지 못했구나. 엄마가 정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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