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보노로 근무했던 첫 직장에 입사한 지 며칠 안 되었을 때 입사 전 구직활동을 했던 곳에서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었다. 프로보노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무료봉사’라는 뜻으로 원래는 변호사가 소외계층에 대한 무료로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당시 내가 이해한 바로는 ‘프로보노’라는 형태의 일자리는 경력단절여성들에게 일자리 제공을 위해 만든 ‘유급 전문봉사직’ 같은 개념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세금 떼지 않고 일당 3만 원의 페이를 월급 형태로 받으며 일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내가 중간에 다른 곳에 취업이 되어 가더라도,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예산을 준 G여성가족지원재단의 입장에서 보면 경력단절여성이 브리지(bridge) 경력을 쌓아 더 좋은 일자리로 옮긴 것 자체가 사업의 취지에도 맞고 바람직한 성과일 것이었다. 2010년 10월 말경 내가 면접을 보러 간 곳은, 서울 여의도에 있는 N전직지원센터였다. 당시 서울 외에도 인천, 경기(수원), 대전 등 각 광역시도에 지사가 있었으므로 내가 만약 합격한다면 경기센터(수원)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이 면접은 여러 가지로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우선, 입직 초기에 본 면접이었기에 모든 면접 경험이 다 그렇듯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지만, 특히 잘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내가 유일하게 서울에서 본 면접이었고, 셋째는 그때 당시에는 개념도 잘 인지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름(?) 블라인드 채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2010년 직업상담사로 입직하여 이후 10년 이상 내가 보았던 20번 이상의 면접 중 유일하게 ‘정규직 면접’이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나는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딴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무경력자이자 새삥이었다. 4명의 면접관과 3명의 면접자로 이루어진 다대다 면접이었다. 면접자는 모두 여자였다. 첫 번째 지원자는 나보다 더 먼 지방거주자로서 50대 여성이었다. 그분은 이미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상담업무를 하고 있는 재직자였다. 하지만 채용이 되면 당장 11월부터 출근할 수 있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12월에 계약이 종료된 후에 올 수 있다는 대답을 하였다. 나는 그 대답에 안도했다. 지원자 중 유일하게 직업상담 업무를 하고 있었지만, 내가 만약 채용하는 기업의 입장이라면, 한 달 반씩 지원자를 기다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나의 경쟁상대는 서울에 거주하는 서른두 살의 미혼 아가씨라고 생각되었다. 본인만의 강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써치펌 회사의 2년 경력자로서, 기업 관련 데이터와 정보들을 활용하여 중장년구직자들의 이직과 전직을 효율적으로 도울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였다. 당차고 자신감 있게 어필하는 모습에, 그 경력이 너무 부러웠다.
하지만 나에게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경력도 없던 내가 '두 사람에 비해 어떤 차별성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비록 경력은 없었지만, 밝고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에, 자격증 취득 이후에도 직업상담사로서 여러 가지 직무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 왔음을 어필했다. 다른 면접자 두 사람에 비해 내가 어필할 부분은 그 부분밖에 없었다. MBTI, STRONG 등의 직업심리검사도구 활용능력과 취업지원 기관에서 경험해 본 집단상담 프로그램 진행에 대한 자신감 등을 어필했다.
하지만 결과는 냉정했다. 아니,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에는 내가 너무 초짜여서 내가 정말 면접을 잘 봤다고 착각을 했었다. 면접관들의 질문이 내게 쏠렸었고, 그 많은 질문들에 모두 다 대답을 잘했기 때문에 내가 면접을 꽤 잘 봤다고, 합격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심 기대를 했다. 나중에 경력자가 되어 그때의 면접상황을 돌이켜보니, 나를 뽑을 이유가 없었다. 그날 면접관들이 내게 했던 질문들을 복기해 보면 면접관들은 내게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 질문을 한 것이었다.
“이 분야에 전혀 경력이 없는데, 어떻게 일할 계획이세요?”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 아이들은 누가 케어하나요? 만약 아이들이 갑자기 아프면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집이 먼데, 본사까지 출근은 가능하세요?”
“본인의 경력목표가 무엇인가요?”
나는 매우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잘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런 건 다 소용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확인되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믿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모두 다 미래 공약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나는 집도 멀고, 돌봐야 할 아이들까지 많은 유부녀였다. 어린아이들을 전담해서 돌보아주는 양육자도 없이 오로지 우리 부부만의 힘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일을 한다는 것이 고용자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리스크로 작용했을 것이었다.
자격증 취득반에서 공부하던 시절, L교수님께서 해주셨던 말이 생각났다. 항상 서류지원과 면접을 같이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다. 아무리 서류에 통과해도 면접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어차피 취업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험 없는 구직자들이 서류에서 매번 탈락하니까, 서류준비에만 올인을 한다. 일단 서류만이라도 붙고 보자는 생각으로 면접 준비는 뒷전이다. 하지만 면접통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갑자기 금요일에 연락이 와서 월요일에 면접 보러 올 수 있느냐고 한다. 더 심한 경우에는 내일 당장 면접 볼 수 있냐고도 묻는다. 그러면, 준비 안된 면접자는 백발백중 떨어진다. 옷이랑 신발도 사야지, 머리도 해야지, 면접질문에 대답준비도 해야지. 허둥지둥 급하게 준비하지만, 옷도 머리도, 면접상황도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준비 안된 면접자가 노련한 면접관들을 설득할 확률은 거의 없다.
L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었는지, 내가 경험을 통해 갖게 된 개똥철학인지 헷갈리지만, 면접에서 제일 불운한 경우는, ‘면접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때 정말 좋은 면접의 기회가 찾아오는 경우’다. 왜냐하면 거의 백발백중 놓칠 테니까. 나에게는 그 면접이 딱 그런 경우였다. 어쨌든 당시에도 너무너무 아쉬운 면접이었고, 이후에 한번도 경험할 수 없었던 단 한번의 정규직 면접자리였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았던 면접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G여성비전센터에서 두 달간의 근무 기간을 채울 수가 있었다. 드디어 경력단절여성으로서 첫 경력시작의 물꼬를 튼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