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 내리는 날의 무용 수업
“장만데 무용하러 갈 거가?”
남편이 물었다.
“응, 당연하지. 작년에도 갔는데?”
앞서 삼 주 동안 결석한 사람 치고는 꽤 성실해 보이는 답변을 해 보였다. 사실 아이가 예정대로 등원을 하고, 내 몸이 성하다면 태풍이 부는 게 아닌 이상 무용 수업을 들으러 가지 못할 하등 이유가 없다.
비 내리는 아침, 아이와 서두르다 보니 예정보다 외출 준비가 일찍 끝나버렸다.
“오늘은 엄마가 어린이집까지 직접 데려다줄까?”
하는 물음에 아이는 이런 날이 오기만을 오래도록 기다렸다는 듯 환한 얼굴로 답한다. 평소와는 달리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양말과 신발을 신고 가방까지 멘 채 비옷을 꺼낸 아이는 혹여나 엄마가 늦게 준비를 해서 결국 등원 버스를 타게 될까 봐 걱정이 됐는지 현관 입구에서 자꾸만 나를 부르며 재촉까지 한다. ‘다 됐어, 간다 가!’ 아이를 어르듯 대답하며 원래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는데 건물 밖은 바람이 불어 비가 채 땅으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자꾸만 모로 누워 날아간다.
이런 날씨라면 분명 등원버스도, 택시도 늦게 올 거다. 실은 아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닌 수업에 늦고 싶지 않아서 아이를 직접 데려다 주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집 앞은 돌풍이 부는데 다행히 택시를 타고 어린이집 쪽으로 가보니 다른 곳은 모두 바람도, 비도 잠잠하다. 아이를 원에 데려다주고 다시 택시를 타고 문화회관으로 가는데 엄청 일찍은 아니더라도 평소에 비하면 꽤 여유 있게 도착했다. 덕분에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믹스커피까지 한 잔 마시며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지난주에는 자리를 빨리 잡지 못해 춤을 출 때 어려움이 있었다. 앞자리에서 추고 싶은데 늦게 도착하다 보니 뒷자리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춤을 추는데 거울로 내 모습을 볼 수 있어 몸의 모양이 잘 보였다. ‘이대로라면 틀리지 않고 잘 출 수 있을 거 같은데?’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잘 출 수 있을 거라며 ‘딴생각’을 하느라 동작을 틀려버린다. 게다가 오늘따라 자꾸 산만한데 싶어 봤더니 마스크를 뺀 내 얼굴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연습실에서는 마스크를 계속 착용해 달라는 권고사항이 있어 수업 시간에는 언제나 마스크를 끼고 있는데 오늘은 천식 증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맨얼굴로 춤을 추고 있는 상태였다.
기본무는 쉬워서 추다 보면 금세 딴생각을 하게 되는데 마치 버튼을 누른 듯 딴생각을 하자마자 동작을 틀리기 일쑤다. 어려운 춤을 출 때는 잡생각이라는 걸 할 틈이 없는데 기본무는 오히려 온갖 망상에 빠지기 쉬워서 혼자 딴생각을 하느라 틀리는 일이 많다. 혼자서 뜬금없이 다른 동작을 하고 있으면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지거나 웃음이 나는데 지금까지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틀린 동작만 수습하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틀릴 때마다 웃기다며 웃는 내 모습이 거울에 그대로 비치는 바람에 곤욕스러운 때가 많다. 무용 수업에서 마스크가 하는 역할이 생각보다 더 많다는 걸 실수 후 해실해실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깨닫는다.
조금 전만 해도 웃으며 춤을 췄지만 입춤을 추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선생님의 팔, 다리를 쳐다보느라 마스크를 끼지 않은 내 얼굴을 쳐다볼 여유도 없다. 지난주에 이어 세 번 연속 돌기 연습이 이어지고 오늘도 어김없이 새 진도를 나간다. 지난주에 배운 동작과 비슷하게 이번 주도 동작은 어렵지 않지만 이번에는 몸의 각도와, 팔의 모양을 만드는 게 어렵다. 선생님을 보며 춤을 추고 있다 보면 뇌는 분명 선생님과 똑같은 동작을 하도록 팔다리에게 주문을 하는데 막상 거울을 보면 내 몸이 얼토당토않은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팔다리가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나뿐은 아니라 선생님은 계속해서 '팔을 쭉 뻗지 말고, 둥글게!'를 외친다. 근데 둥글게 한다고 그 모양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 어째서 아무리 몸을 움직여봐도 선생님과 같은 모양은 만들어지지 않는 건지 의아할 뿐이다. 쉬는 시간이 다가오고 이번에는 지난주와 달리 다들 더위에 지쳐서 바닥에 철퍼덕 앉아 휴식을 취한다. 테이블과 좌석이 있는 바깥은 비가 오는 데다 어째서인지 실내보다 더 더워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연습실에서 땀을 식힌다.
장마철, 습도 높은 여름날은 가만히만 있어도 덥다. 그런데 속바지에, 속치마, 겉치마까지 입고 춤을 추려니 안 더울 수가 없다. 아무리 얇은 치마를 골라 입는다고 해도 재질 특성상 안 더운 치마는 없다. 그래도 좀 얇은 옷을 찾는 분에게 동기 님 하는 말씀이 여름에는 벌거벗어도 덥단다. 그 말이 정답. 혹여나 발가벗고 춤을 춘다고 해도 이런 습한 더위에는 땀이 날 게 분명하다. 아직은 육 월이라 회관에서는 에어컨을 세게 틀어주지도 않으니 다들 땀을 흘리고 헉헉 대며 춤을 춘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오히려 에어컨 바람 덕분에 덜 더울 수도 있으나 요즘처럼 눅눅한 장마 날씨에는 온몸이 습기와 땀으로 끈적거리기까지 한다.
뒷 시간에는 몇 명씩 나누어 춤을 추며 동작을 선생님께 점검받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반씩 나누어 춤을 춰도 충분히 긴장이 되는데 이번에는 세 팀으로 나뉘어 춤을 추니 떨려서 더 많이 틀린다. 다 같이 출 때보다는 아무래도 몸이 쉴 틈은 있지만 관객 앞에서 춤을 추려면 땀은 더 난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다음에는 한 명씩 추게 할 거라는 무서운 소리를 한다. 부디 농담이길 바라는 동안 수업은 끝. 마무리로 한삼춤을 출 겨를도 없이 입춤으로만 한 시간을 꽉 채워 춘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옷을 갈아입는데 속치마의 허리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피부에 닿는 속바지나 상의와 달리 속치마나 치마는 매주 빨지는 않는데 여름동안은 이렇게 땀을 흘리기 때문에 매주 빨 수밖에 없다. 갈아입은 옷을 죄다 가방에 쑤셔 넣고 연습실을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데 피부에 느껴지는 수분기가 빗물인지 땀인지, 것도 아니면 공기 중에 있던 습기가 모인 건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예전에는 이런 상태를 굉장히 찝찝하게 느꼈던 때도 있지만 무용 수업이 끝나고 몸에서 나오는 열기를 식히며 느릿느릿 걷는데 마치 열심히 춤을 추고 나와 땀을 식히는듯한 기분이 들어 상쾌함과 더불어 홀가분함이 느껴진다. 장마철의 외출은 좋아해 본 적이 없는데 무용 수업 덕분에 이런 날에도 밖을 걷는 것이 기분 좋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