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은 세 시간 : 일상 에세이
어린이집 버스에서 내린 아이를 데리고 마트로 향하는 길. 집 앞 작은 카페 유리창 앞에 ‘여름 이벤트 아이스 아메리카노 천 원’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 좀처럼 할인 이벤트를 하지 않는 카페에서 할인 이벤트라니 기쁜 마음보다는 덜컥하고 놀라기부터 한다. 혹시 손님이 줄었나. 카페 맞은편에 있던 은행이 바로 얼마 직전에 문을 닫았는데 이러다 이 카페도 없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집 근처에 마음 붙일 가게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했는데 한 곳이 생겨났다가 사라진 이후로는 좀처럼 찾기가 힘들다. 여름 이벤트 중인 집 앞의 작은 카페는 공간이 협소하여 머물다 가기에는 조금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오랫동안 버텨주는 모습이 감사하여 일부러 그곳에서 원두를 사거나 괜히 지나는 길에 커피를 한 잔씩 사러 들리기도 한다.
요즘은 원두도 온라인 주문이 가능하고, 선택의 폭도 넓어서 굳이 집 앞의 카페에서 원두를 사지 않아도 된다. 커피도 웬만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는 디저트 포함 배달 주문이 돼서 굳이 나가지 않아도 집에서 홈카페를 즐길 수 있다.
카페뿐 아니라, 마트에 가지 않아도, 직접 나가지 않아도 웬만한 건 다 집에서 해결할 수 있다. 집 앞의 사라진 은행도 그래서 사라졌다(실은 추측일 뿐이다). 은행에 가지 않아도 대부분의 업무가 가능해진 시대. 돈을 넣거나 뽑을 때에는 ATM 기계만 있어도 되니까, 요즘처럼 이율이 낮은 때에 굳이 은행에 가서 투자 상품을 알아보러 가는 사람도 많지 않을뿐더러 대출할 때 아니면 은행에 갈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우리 집 앞의 은행은 대출 업무는 잘 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실적이 많이 나지 않았나 보다. 적금을 넣으러, 또 해지하러 갈 때마다, 혹은 페이지를 다 채운 통장을 바꾸러 갈 때마다 들렀던 은행에서 얼굴을 익힌 경비원, 직원들은 이제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으려나.
그들을 못 보는 게 아쉬운 게 아니라 사람이 있던 자리가 빈 곳으로 바뀌는 게 아쉽다. 편리한 세상도 물론 좋지만 그래도 사람이 있는 세상이 좋다. 한때는 사람을 직접 보지 않으니 편안하고 좋다고 느낀 적도 있다. 잘 모르는 사람과 말을 섞는 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일보다는 혼자 있는 게 좋고, 좋아하는 사람을 자주 보지 못하는 건 외롭지만 그래도 가끔 메시지로 안부를 묻거나 서로의 SNS를 보며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위안 삼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자꾸 사람이 그립다. 온기가 느껴지는 대화를 나누는 경험이 쌓일수록 더 그렇다. 볼 때마다 차 한 잔 하러 오라 말해주는 옆집(그러나 용기가 안 나 아직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흔쾌히 아이 신발을 물려주는 이웃, 아이를 반겨주는 마트 직원분들, 자기도 잘 모르는 그라인더의 사용법을 함께 고민해준 카페 사장님 등 사소한 혹은 몸에 베인 친절을 베푸는 이들 덕분에 사람을 마주칠 수 있는 길이 좋아지고,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좋아졌다.
세상이 편리하게 변화하고, 게다가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떠나는 사람들은 늘고 드는 사람은 줄어든다. 누군가는 떠나고 그러다 또 누군가가 다가오는 일은 조금 긴장되지만 그래도 새로운 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예전보다 더 반가울 수도 혹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떠난 자리를 채워주는 이가 아무도 없으면 그저 허전하고 외로울 뿐이다.
문득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날, 가족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고 싶은 날, 고민을 해도 갈 곳이 없는 게 쓸쓸한 정도는 아니지만 아쉽다.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니라 있던 게 없어지니 그리운 거 같기도 하다. 자주 가다 보니 가벼운 안부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는 단골 가게가 있다는 것, 적금을 넣었다 깼다 해도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사정을 아니 부담스러운 상품은 권하지 않는 은행원을 안다는 것, 흔히 핫하다고 말하는 인기 있는 가게는 아니지만 부담 없이 가족 식사가 가능한 가게가 집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편리하고, 또 정이 느껴진다. 집이 있는 동네라고 다 정이 가는 건 아니니까 결국 동네에 정을 붙이게 하는 건 집 이외의 정이 가는 공간이고,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 덕분이다.
오며 가며 익숙하게 바라보던 가게가 있고, 간판이 있고, 얼굴이 있다는 것의 소중함은 있을 때보다는 사라졌을 때 더 크게 와닿는다. 정을 붙인 카페가 있던 자리, 정을 붙인 어린이집이 있던 자리, 그리고 정을 붙였다기보다는 눈에 익었던 은행이 있던 자리의 텅 빈 공간을 볼 때마다 남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사 온 후 한동안 동네에 정을 붙이지 못했던 내게 곁을 내주었던 공간들, 사람들. 그들 덕분에 나도 이 동네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그러니 나는 내가 늦게 정을 붙인 만큼 정을 떼는 것도 조금은 천천히 하고 싶은 욕심에 괜히 더 열심히 동네를 기웃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