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은 세 시간 : 일상 에세이
사회자의 ‘1등은요’ 하는 말에 숨 쉬는 것도 멈춘 채 그의 입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꾸 뜸을 들이는 탓에 숨을 계속 참지는 못하고 시선만 고정한 채 호명될 그룹의 이름을 기다리는데 ‘1등은 **입니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깨의 힘이 쭈욱 빠지면서 몸통의 중간서부터 속상함이 울컥하고 올라와버렸다. 어쩌면 우리 애들이 1등을 할지도 몰라, 하고 생각했던 건 팬인 나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팬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판단했다면 이런 실망 따위는, 속상함 같은 건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지 몰라. 는 무슨 그런 객관적인 판단 같은 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아이돌을 위해 이렇게 돈 쓰고 시간 쓰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
열심히 꾸준히 성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째서인지 마음이 좋다. 별로 노력도 안 한 거 같은데 성공을 거머쥔 이들을 볼 때는 괜히 베알이 꼬이기도 하고, 어쩌면 내가 모르는 노력이 있었을지도 몰라하고 합리화를 시키기도 한다.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하는데 인생이 꼬이기만 하는 삶, 그럴듯한 성공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누군가를 보는 것은 안타까워서, 이왕이면 밑바닥부터 천천히 올라와서 결국엔 커다란 성공을 이루어냈다 같은 성공신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내가 최근 몇 달간 아이돌 덕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도 다 이 성공신화 한 번 지켜보겠다고 한 거 아니겠나.
그런데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은 이번에 결국 성공신화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아마 다음에는 이뤄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정작 내 인생의 성공신화도 아직 이루지 못했는 걸.
글 구독 서비스가 없는 달이면 출판사 위고, 제철소, 코난 북스에서 펴내는 <아무튼> 시리즈를 찾아 읽곤 한다. 이번에는 <아무튼, 목욕>이랑 <아무튼, 여름>을 읽었는데 그중 <아무튼, 여름>에서 이런 문구가 나온다.
- 뼛속까지 모범생인 사람은 ‘최선을 다하면 그만큼의 결과가 따라올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근면 성실한 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밝은 미래가 찾아올 것이고,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고, 마음을 다해 헌신하면 상대가 그 진심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번번이 좌절한다.
어릴 땐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노력하는 일이 즐겁지 않으니 ‘즐기며 살자’ 쪽으로 마음이 더 갔을 뿐이지. 그렇지만 그것도 어른이 되면서부터는(스무 살이 되었을 때 말고, 진짜 조금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을 때) 즐기는 것보다도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런데 노력하면, 즐기면,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아무튼, 여름>의 작가님처럼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지 않나, 노력해도, 즐겨도, 최선을 다해도 성공은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다는 걸.
나의 아이는 그러니까 진짜 내 자식은 아직 어려서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하는데 좋아하는 아이돌은 볼 때마다 좀 잘 됐으면 좋겠고, 성공했으면 좋겠고, 실수하는 거보면 ‘관리 좀 더 잘하지’, ‘연습 좀 더 하지’ 하는 마음이 들어버린다. 그리고 잘하는 걸 볼 때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잘하는데 왜 더 성공 못하는 거지. 어떨 땐 저들이 노력하는 게 내 눈에만 보이나? 싶은 생각마저 하게 된다. 열심히, 잘해도 더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응원하게 되는 건 ‘희망’, 저들이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걸 보면 나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지도 몰라하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거 같아서다.
얼마 전, 소설 <니클의 소년들>을 읽고 나서 분한 마음이 들었던 건, 그 소설이 똑똑하고 성실했던 소년이 불운으로 인해 망가져 버리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엘 우드에게는 날 때부터 꿈과 희망이 있었지만 그의 타고난 또 다른 조건과 불운이 그의 노력과 비상함을 짓밟아버렸다. 그의 비범한 모습은 다른 이에게 영감과 영향력을 줬지만 정작 본인은 불구가 되었고 오래 살아남지도 못했다.
‘뼛속부터 모범생이었던’ 엘 우드는 남들보다 똑똑했고 남들보다 열심이다 죽었다. 누군가는 결국 성공이라는 것도 사주팔자에서부터 정해져 있는 거라고 하던데 엘 우드는 똑똑하고 성실하지만 결국에는 운이 나빠, 더러운 세상의 표적이 되어 죽을 운명이었던 걸까. 최애(이 글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을 칭하는 말)는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서 더욱 성공할 수 있을까, 나도 언젠가 정말 잘 쓴 글로 돈도 잘 벌고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운명은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걸까. 송민호처럼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줘!’ 하고 하늘에 외치고 싶은 심정이 든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말은 ‘대기만성형’이라는 말이다. 이 정도 했으면 됐어, 하고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대기만성형’이라는 말이 발목을 붙잡는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내 인생도 달라졌을지 몰라, 하고 후회하기 싫어서 다시 조금 더 열심히 해보기로 마음먹게 되는 건 어쩌면 내가 그 ‘대기만성형’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이렇게 글을, 환경을 좋아하는 마음을 놓지 않고 열심히 계속해서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고문 속에서 글을 쓴다. 우리 중 누가 대기만성형 일지는 때가 오지 않으면 모르니까. 그러니 죽기 전까지는 계속 열심히 글을 쓰자, 열심히 노래하는 우리 아이돌을 응원하자, 마음먹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고, 점을 보려 하지 않는 한 내 사주를 알 길이 없으니 어쩌면 내가,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대기만성형일지도 모른다는 희망고문은 ‘지겨워, 지쳤어’ 말하면서도 또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게 약일지, 독일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제는 희망고문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건지, 포기할 수 없어 희망고문에 매달리는 건지, 어느 쪽인지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