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과, 나

치료와 삶

상대적 박탈감. 참으로 흥미로운 용어다.


‘개인이 다른 집단의 조건이나 상황을 자신의 조건과 비교하면서 생기는 열등의식.’


사전에 나온 정의다.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 사회학적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타인과의 비교는 경쟁이라는 산물을 만들어 낸다.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 의미 있는 생존 본능 중 하나이다. 특히나 경쟁을 요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학습된다. 우리들의 의식 저변에는 ‘나는 다른 사람보다는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적당함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항상 중간만 하려는 버릇이 생겨 났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도 딱 남들이 하는 정도의 비교만 하면서 살려고 한다. 뭐든 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는 법. 과한 욕심에서 비롯된 비교가 일그러진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치료실에서도 이런 비교를 볼 수 있다. 하루아침에 생겨난 장애라는 절망의 상황, 여기로부터 생겨난 어긋난 감정으로 생겨난 두 가지 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치료실. 많은 문헌에서 감각 자극은 치료에 중요한 수단이라 이야기한다. 뇌나 척수 같은 중추신경이 다친 경우, 감각의 처리과정 자체가 어려워진다. 감각의 입력이 정확할수록 마비된 곳에 정확한 운동 출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너무 많다. 수십 명의 환자와 보호자, 그들을 치료하는 치료사까지, 이미 집중시키기엔 자극 요소가 너무 많다. 심지어 치료에 사용되는 각종 기구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소리까지 포함하자면 치료실의 문을 여는 순간 그야말로 장날의 시장 한 복판을 상상을 하게 한다. 종종 조용한 독방에서 치료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런 환경으로부터 생겨난 부작용 중 하나가 다른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이 동시에 생중계된다는 점이다. 다른 선생님들의 치료를 보며 서로 간 환자와 보호자의 혹독한 치료 평가를 받는 것은 물론, 우리의 치료가 병실에서 떠도는 즐거운 화젯거리가 된다. 다행히 나의 화려한 언변(?) 덕분에 비교적 좋은 신뢰관계를 쌓는 편이기는 하나 뒤에서 어떤 이야기가 돌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소아 치료실에서는 치료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보호자가 논문을 찾아와 치료사를 시험해본다고도 하니 부담감을 넘어 압박감이 느껴질 것만 같다. 그래서 가끔은 배정된 초기부터 조금 어려울 수 있는 기술적인 치료를 보여드린다. 앞으로의 시간을 원만하게 하기 위함이다. 치료사에게 쉽지 않은 부분인 만큼 이런 치료에 대해선 이견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컴플레인은 오롯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진행하는 것이 마음 편할 때가 많다.

능숙한 치료 기술로 걷는 모습을 보는 순간 당사자와 보호자는 기쁨의 환호를 보낸다. 알게 모르게 담당 치료사도 뿌듯함을 느낀다. 환자도 나도 기뻐하면서 신뢰를 쌓을 수 있으니 좋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환희의 현장이 다른 환자에게도 생중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옆에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환자가 누워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왜 나는 저렇게 할 수 없는지 속이 타들어만 간다. 한쪽에서 높아지는 환호성만큼이나 다른 한쪽에서는 시름이 깊어져 간다. 박탈감 속에 조심스럽게 건네는 한 마디,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요?”


아! 가장 곤란한 질문 중 하나다. 이 질문을 받은 치료사는 땀이 나기 시작한다. 이미 평생 걸을 수 없다 선고받은 사람에게 ‘열심히 하면 걸을 수 있어요’라 말할 수도 없고 ‘더 이상 걸을 수 없으니 저런 치료는 지금 몸 상태에서 무리만 줄 뿐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쓴웃음만 건네드린다.


앉지 못하는 사람은 휠체어에 탄 사람을 부러워한다. 앉아 있는 사람은 경사 침대나 기립대에 서있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가만히 서있는 사람은 걷고 있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한다. 심지어 걷고 있는 사람조차 아프지 않은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교하는 심리는 치료의 동기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조급함과 욕심이 되어 나타난다. 사람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당연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다만 모두가 같은 곳을 다친 것이 아닌 만큼 회복할 수 있는 신체적 한계도 분명 다르다. 누군가는 지금의 의학으로는 걸을 수 없다. 앞으로 기술의 발전이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란 희망이 있더라도 아직까지는 벗어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쩔 수 없이 휠체어 생활을 해야 하며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나는 이런 질문이 나오려 하면 애초에 질문을 봉쇄해 버리고는 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게 무엇이 좋아졌는지 비교해보라고 이야기한다. 다친 곳이 다른데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의 회복 과정을 되뇌는 것만큼 치료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없다며 생겨서는 안 될 열등감을 위로한다. 치료 초기보다 좋아진 현재를 보며 나름의 위로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안심이 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울 뿐이다. 이 말이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위로이자 응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 사람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다른 지위 아래 벌어지는 갑질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뉴스를 보면 수면 위에 드러난 놀라운 갑질의 행태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내가 상대방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이 다른 이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우수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를 지나치게 억제하게 되면 우울감에 빠지게 되는 만큼 적당한 우월감이 가져다주는 이점도 있다. 주로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호르몬은 도파민이다.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 나타나는 호르몬답게 사람의 성장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권력은 중독된다 하였던가. 갑의 위치에 오르게 되면 뇌는 변한다. 성공을 이뤄 갑의 위치까지 갔다면 이미 그 사람의 뇌는 도파민이 주는 만족감으로 가득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파민의 과잉은 권력에 대한 중독을 야기한다. 더욱더 남들보다 뛰어나야 하며 더욱더 나보다 낮은 이들을 통제하는 전능 감을 누려야 한다. 이런 우월감은 태도가 되어 드러난다. 치료를 하다 보면 이런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병도 돈이 있어야 낫는다는 생각이 일을 하다 보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대학병원에서 치료받는 사람들 중 본인의 재력과 힘을 이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큰 병원에서 치료한다는 것 자체가 입원하기 위해 상당히 복잡한 과정과 큰 비용을 들여야만 한다. 당연하게도 일정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우선권을 가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 지위를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분들도 있는 반면 기존에 받던 대접을 그대로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심리에는 지금까지 노력해서 얻어낸 대우를 받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태도가 다른 이들을 향한 피해가 되어서는 안 되는 데도 말이다. 그런 태도들이 마음 한편을 씁쓸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한 마디가 있다.


“저 사람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오히려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을 요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더욱 자주 듣는 말이다. ‘당신도 같은 환자입니다. 쉽게 그들을 판단하지 마세요!’ 마음속으로 외쳐보지만 그들을 치료해야 하는 치료사이기에 앞에선 적당한 반응을 보여주고 되도록 빨리 말을 돌린다. 혹여나 말의 당사자가 듣고 상처 받을까 괜히 내가 조마조마하며 눈치를 본다. 어떻게 타인의 아픔을 내 만족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최근 원함 체계(Wanting system)와 좋아함 체계(Liking system)가 구별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다른 사람이 가진 걸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원함 체계가, 누가 없더라도 스스로 만족감을 느낀다면 좋아함 체계가 가동되었다. 쉽게 말해 원함 체계는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얻어진 행복이라면 좋아함 체계는 정말 좋아해서 마음을 통해서 얻어진 행복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는 치료는 어제의 나와 달라지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가는 과정. 치료사는 환자와 동행하며 희망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더욱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얻는 우월감이 아닌 진짜 만족감을 얻기 원한다. 무엇인가를 원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간다는 그 자체를 좋아하길 희망한다. 비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환자로서 이런 마음을 가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언젠가 진짜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치료하며 겪는 모든 과정 자체를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나와 만나는 모든 이가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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