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와 삶
이상하다. 분명히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일이 많다. 배정과 대기자 목록을 다 작성을 끝마친 후에도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기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아침이다. 헐레벌떡 배정을 마치고 보니 어느덧 8시 30분, 이제 치료실 문을 열 시간이다. 로봇 치료실과 운동치료실에서 오전, 오후를 나누어 일하게 된 나는 로봇 치료실에서 한 명이 휴가를 가게 되면 지원을 가야 된다. 이런 이유로 하루 종일 로봇 치료실에서 근무하게 된 날. 하필 치료실의 총책임자 선생님께서 휴가를 쓰신 날이라 평소보다 긴장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한쪽 주머니엔 전화기를 넣고 치료용 로봇에 붙어 치료를 하는 환자를 열심히 로봇에 묶어 주고 있다. 몸은 로봇 앞에 남아 있는 와중에도 머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 남겨진 행정업무를 보고 있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업무가 나를 짓누른다.
로봇 치료는 요 근래 트렌드가 된 재활의 한 분야이다. 비록 2000년대 이전부터 만들어졌으나 그 효과가 입증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환자에게 새로운 기술에 대한 바람이 높은 편이다. 높은 요구도에 비해 기기에 대한 가격이 만만치 않다 보니 상용화는 많이 되지 않았다. 시설이 갖춰진 상급 병원에 로봇이 몰려 있는 실정이라 입원하면 너도 나도 로봇 치료를 우선적으로 받기 희망하고 있다. 지금까지 걷게 해주는 건 사람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로봇이 나타나 걷게 해 주니 환자로선 쾌재를 부를 일이다. 재입원하는 환자라면 입원과 동시에 로봇 치료 대기부터 넣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다. 처방은 넘쳐나고 로봇과 일할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조금이라도 회전율을 높여야 한다. 자연스럽게 치료 외에 해야 하는 행정업무는 산처럼 쌓여만 갔다.
옆에서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대체적인 반응은 이렇다.
“로봇을 묶어 주는 것이 생각보다 복잡하네요?”
환자들에게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처음 받아보는 치료이다. 때문에 로봇 치료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모르고 오시게 된다. 기계의 도움을 받아 걷지 못하는 사람이 정확한 자세로 오래 걷게 해주는 로봇치료. 치료는 제대로 묶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이언맨 슈트처럼 자동으로 딱딱 맞춰지면 너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거기까지 기술이 도달하지는 못한지라 치료사가 각기 다른 환자의 신체 사이즈에 맞춰 정확한 자세로 묶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30~40분 동안 진행되는 보행 치료가 안 좋은 결과를 미칠 수 있다. 장착 시간이 길어질수록 걷는 시간은 줄어든다. 이 때문에 빠른 손놀림까지 요한다. 로봇을 적용하는 치료사의 정확한 교육과 숙련도가 제대로 된 치료의 시작점이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숙련도가 갖춰진 사람과 갖춰지지 않은 사람이 묶은 로봇을 보면 그 차이는 극명하다.
로봇이 해주는 치료라도 장착하는 동안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보행이 시작되고 나서도 걷는 모양을 계속 체크하면서 변화를 줘야 학습이 일어난다. 하나의 로봇에만 집중해도 한 타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문제는 로봇을 한 대가 아닌 일인당 두대 씩 봐야 한다. 더불어 중간, 중간 남는 시간에는 쌓인 행정업무를 봐야 한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남는 시간에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로봇을 잘 모르고 있는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는 사람 조차 그렇게 말할 정도니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모든 컴플레인은 우리가 떠맡아야 된다.
조심했어야 했다. 평소보다 일이 많아서 과부하였다. 일이 돌아가는 과정을 꼼꼼히 체크할 여력이 없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한 명의 보호자가 치료실로 찾아왔다. 이미 얼굴은 참을 수 없는 화를 가득 채우고 있다.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 볼 새도 없이 들어오자마자 소리를 지른다. 바뀐 시간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간병인 여사님이 승낙하신 시간이라 바꿔 드렸는데 보호자가 승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치료실은 고함으로 채워졌다. 가뜩이나 내가 바꿔드린 시간이었다. 등에는 땀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 다른 환자들이 있어 진정시키려 가보지만 이미 진정이 되지 않는 수준이다. 최고 선임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날이다 보니 치료사 모두가 보호자보다 어린 상황, 그나마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던 유교식의 나이를 이용한 방어도 불가능하다. 고스란히 그 분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표를 바꿔드리고 나서야 치료실에서 떠날 기미를 보이신다.
“끈이나 묶는 것들이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보호자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유유히 치료실을 떠나간다. 마지막 한마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치료가 잘 진행될 때는 우리 선생님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결국 나는 끈이나 묶어주는 놈이었다. ‘내가 이러려고 일했나...’ 괜한 자괴감이 들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그 점에 있어서는 후회가 없었다. 그럼에도 과연 담당 주치의나 교수님이었다면 과연 저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바쁜 와중에도 문득문득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는다.
우리나라는 ‘사’라는 단어가 들어간 직종을 매우 선호한다. 하지만 ‘사’라는 단어도 한문 표기에 따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단어에서부터 우리 사회 전반에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승 사(師)와 선비와 기술을 나타내는 사(士)의 차이는 단순히 단어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 속에 넘을 수 없는 계급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죽하면 간호원이라는 명칭이 보조의 의미로 비칠까, 스승 사(師)를 사용하여 간호사라는 명칭으로 바꿨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아서 인지 간호사 선생님들을 ‘야’ 나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불러 물의를 일으키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한 마디를 듣게 된 선생님들의 하루는 어떨까? 그 뒤로 환자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똑같을까?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들게 하는 말을 듣고 나서도 똑같은 태도를 요구한다는 것이 무리 아닐까.
오늘 내가 건네는 한 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을 죽일 수 있다. 반대로 나의 선한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 어딘가에서 더 큰 영향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 사회적 인식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쉽게 바꿀 수 있는 자신의 한마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기억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