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를 지어 주세요

치료와 삶

그 흔한 노래 가사 하나도 흐르지 않는 치료실에선 치료 소리와 기계음만 가득하다. 벽면에 붙은 여러 대의 전동 자전거가 삐그덕 대는 소리, 발바닥 진동장치가 달린 경사 침대가 떨리는 소리,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환자에게 힘주라는 소리, 치료하며 소리 지르는 환자의 소리. 무더운 한 여름에 공사 중인 곳의 소리를 듣는다면 이렇지 않을까. 수많은 소리가 각자의 할 일을 뽐내며 튀어나온다. 제각기 다른 소리 중에 한 가지, 찾기 힘든 소리가 있다. 바로 웃음소리다.


재활 병원에선 웃음을 찾기 어렵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병원 생활에 웃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온몸에 주사 바늘구멍이 뚫려 있다. 숨이라도 돌려 보고자 주위를 둘러본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환자뿐이다. 나만 심한 줄 알았더니 옆 사람은 더 만만치 않다. 의사 선생님이 회진 오신다. 치료하면 나을 줄 알았더니 의사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걷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어렴풋이 알았지만 낙담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료실에 올라가 보니 치료는 어찌나 힘든 지. 마음 굳게 먹고 가도 치료실에서 나올 때면 한숨뿐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보호자의 마음은 오죽할까. 이런 상황과 직면하고 있는 사람에게 ‘웃으세요.’라고 말해서 위로가 된다면 더 이상할 듯하다. 어설픈 위로는 현실 도피밖에 되지 않는다. 나와 동료는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깨닫는다. 자연스럽게 치료 시간이 되면 우리들의 웃음도 사라진다.


“선생님은 왜 자꾸 웃고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한 보호자가 나에게 물었다. 치료 시간만 되면 누가 웃으면서 다니니까 이상했나 보다. 인지가 있는 환자의 시간이라 환자도 의아하다는 듯이 함께 물었다. 그러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병원에서 웃을 일도 없는데 저라도 웃어야죠.”


내가 먼저 웃기. 내가 웃기 위해서. 그리고 나를 보는 환자의 웃음을 위해서. 나름대로 내가 취한 전략이었다. 밖에선 잘 웃지도 않는 나이다. 웃는 게 어색하달까? 얼굴에 표정 하나 내보내는 것이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사진을 찍을 때면 나에게 제발 웃어 달라고 사정하기도 한다. 이런 내가 웃을 일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치료실에서 웃고 다닌다니. 아는 사람이 들으면 이 사실만으로 웃을 일이다. 표정 하나 바꾸기 위해 거울 보면서 연습했다. 임상 새내기 시절, 표정 하나 바꾸기 위해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올리고 내리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자연스럽게 치료 시간에도 웃을 수 있는 얼굴이 되어 갔다. 왜 웃냐는 보호자의 질문은 내 노력에 대한 나름의 증거 같은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름 뿌듯하다.


내가 웃으며 장난을 칠 때면 환자들도 웃음으로 화답한다. 보호자도 따라 웃는다. 자신이 환자라는 것도 잊은 채 치료 시간을 보낸다. 고된 하루에 남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치료실에 웃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수많은 소리 가운데 웃음이 노래 가사가 되어 섞여 들어온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일상의 한 순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기억은 감정을 공유한다. 우리의 어떤 행동은 기억을 만들기도 하지만 저장된 기억을 끌어 오기도 한다. 모든 감각 정보는 감정에 덧씌워진다. 공유된 감정은 기억을 강하게 만든다. 우리는 감정을 지배하고 또한 지배된다. 그리고 그 감정으로 덮인 기억으로 살아간다.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을 바꿔간다. 내가 치료실에서 더욱 웃는 이유이다.

뇌를 다치게 되면 인지 기능이 떨어진다. 말이 없어진다. 감정 표현이 사라진다. 얼마 전 표정도 말도 없는 환자가 나를 보았다. 매일 웃으면서 장난치던 나를 기억한 것일까. 씨익 미소를 지어 주었다. 옆에 계시던 보호자께서 이런 모습 처음 보았다며 울 것 같다 하셨다. 작은 미소 하나였지만 감동은 컸다. 내가 살아가는 곳은 그런 곳이다. 그 미소를 보고 싶다.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그 소망을 이루어 가기 위해 웃으며 환자에게 간다. 나의 웃음에 기도를 담아본다.

‘나는 이들의 삶을 바꿀 힘이 없지만 나의 웃음의 이들의 하루를 바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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