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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서윤 Jun 25. 2023

기대 이하 혹은 이상, 그리고 선택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민음사, 2015)에 대한 서평

평점: 4/5

한줄평: 내 인생이 나의 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길 바란다.

*스포일러 그 자체인 서평입니다. 책을 읽고 서평을 읽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1000쪽이 넘는 에덴의 동쪽을 읽기 부담스러우시다면 이 서평을 읽어보시길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은 기대와 다른 삶을 마주하게 됐을 때 인간이 겪는 혼란과 아픔을 묘사한 책이다. 동시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기대와 다른 인생에 좌절할 수도 있겠지만,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혹은 자신의 죄를 다스릴 수도 있는 위대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 책은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동시에 선택을 통해 삶을 바꿀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그러한 사랑스러움을 믿는다.


    <에덴의 동쪽>은 살리나스 계곡을 배경으로 한 3대에 걸친 트래스크 가(家)와 그들의 중국인 하인 '리', 이웃인 '새뮤얼 헤밀턴', 순수 악인 미녀 '케이트'의 이야기이다. 사이러스 트래스크에게는 첫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언제나 순종적인 애덤과 두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음흉해 보이는 찰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사이러스는 순종적이고 잘생긴 애덤을 편애했다. 아버지의 생신을 맞아 애덤은 마을을 돌아다니던 강아지를, 찰스는 거금을 들인 주머니칼을 사이러스에게 선물했으나, 사이러스는 애덤이 선물한 강아지만을 아꼈다. 타고난 것인지 형성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찰스의 폭력성은 애덤을 향했고, 찰스는 분노와 질투에 휩싸여 문자 그대로 애덤을 죽일 뻔했다. 성서 속 '카인과 아벨' 이야기와 똑 닮아 있는 '찰스와 애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 카인이 악인이었기에 하나님이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며 착하게 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성서> 속 '아벨'에 대응하는 '애덤'이 '카인'에 대응하는 '찰스'보다 나은 인간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아버지인 사이러스는 군 생활 내내 창녀와 놀아난 퇴역 군인이었으나, 자신의 공을 부풀려 미국 재향군인회의 장을 차지하고는 횡령으로 얻은 검은돈을 애덤과 찰스에게 물려준다. 찰스는 아버지의 부풀려진 전공을 비판하며 찝찝한 유산을 단 한 푼도 쓰지 않는다. 반면, 순종적인 애덤은 아버지를 믿는다며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 돈으로 피투성이인 채 발견된 미녀 케이트와의 낙원을 꾸린다. 애덤의 눈에 케이트는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불쌍한 미녀였으나, 실제로 케이트는 학교 선생님과 부모님을 살해한 사이코였다. 찰스는 케이트의 본질을 파악했지만 애덤은 자신이 상상하던 이브를 케이트에 투영했다. 하지만 케이트는 애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찰스와도 잠자리를 가진다.


    1부가 끝나며 머릿속에서 '찰스는 악인인가?'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애덤을 향했던 폭력성과 형이 사랑하는 여자와 자는 모습을 보면 의심할 여지없는 악인 같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검은돈을 쓰지 않는 모습과 케이트의 사악한 본질을 파악하는 모습은 비판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항상 의심하며 본질을 간파하고자 하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느껴졌다. 내 눈에 찰스는 그저 아버지의 사랑을 기대했고, 기대와 다른 삶에 실망하고 분노해, 형과 자신의 삶에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선택한 안타까운 인간이었다. 내게 찰스는 악인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오히려 항상 아버지에게 순종적이며, 검은돈과 피투성이 여자를 의심하지 않고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애덤이야 말로 의지도 없고 본질도 모르는 우둔한 인물 같았다.


    케이트도 애덤의 이런 우둔함이 끔찍하게 싫었던 건지 쌍둥이를 출산하자마자 애덤의 어깨에 총을 쏜 후 그를 떠나 창녀가 된다. 케이트가 떠난 후 애덤은 큰 충격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며 쌍둥이를 방치한다. 애덤은 기대와 달랐던 케이트와의 낙원에 실망해 자식마저 내팽겨 둔 채 그저 분노와 슬픔에 젖어있는 걸 선택한다. 찰스에게는 잘못된 선택을 꾸짖어주는 어른이 없었지만 애덤에게는 중국인 하인 리와 새뮤얼 헤밀턴이 있었다. 이들에게 혼쭐이 나고난 후에야 애덤은 쌍둥이들에게 칼렙과 아론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하지만 애덤은 끝까지 쌍둥이들에게 케이트에 대해 고백하지 못한다. 리와 헤밀턴이 '비록 섬뜩한 아름다움이라 할지라도 진실 속에 더 큰 아름다움이 있는 법이다.'라고 조언했음에도 말이다.


    '카인과 아벨'은 '칼렙과 아론'을 통해 다시금 재현된다. 애덤은 찰스를 닮은 까무잡잡한 칼렙보다 케이트를 닮은 금발의 하얀 미소년인 아론을 편애한다. 애덤뿐만 아니라 모두가 아론을 사랑한다. 칼렙은 자신의 형제를 질투하면서도 애덤을 포함한 모두가 아론을 더 사랑하는 건 당연하다며 자조한다. 칼렙은 어머니가 마을의 유명한 창녀임을 깨닫고 고통받지만 아론이 받을 충격을 걱정해 진실을 숨긴다. 칼렙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를 만회하고자 세계대전으로 값이 치솟은 콩을 팔아 번 거액을 애덤에게 선물했지만 애덤은 칼렙이 전쟁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며 비난한다. 반면, 아론이 1년 빨리 대학을 간 것은 샴페인까지 터뜨리며 축하한다.


    거부당했다고 느낀 칼렙은 분노에 휩싸여 아론을 케이트의 유곽으로 데리고 간다. 자신의 어머니가 창녀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 아론은 충동적으로 군대에 자원하고 결국 전쟁 중 목숨을 잃고 만다. 이에 충격받은 애덤은 뇌졸중으로 사경을 헤맨다. 죄의식에 몸 부림 치는 칼렙을 두고 볼 수 없던 중국인 하인 리는 '애덤, 그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려 주세요. 죄의식에 사로잡혀 혼자 괴로워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세요. 애덤, 제 말이 들리세요? 칼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려주세요!'라고 절규한다. 애덤은 '팀셸(Timshel)...'이라 말하고 눈을 감는다.


    팀셸은 히브리어로 '~할 수도 있다.'라는 뜻이다. 애덤, 새뮤얼 헤밀턴, 리가 쌍둥이들의 이름을 지을 당시 이들은 성경 속 '애덤'의 아들이었던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 대해 토론했었다. 그때 에덴에서 추방된 카인에게 하나님이 판본에 따라 '너는 너의 죄를 다스려라' 혹은 '너는 너의 죄를 다스릴 것이다'로 다르게 말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에 대해 더 탐구한 리는 히브리어로 쓰인 초판 성경에는 팀셸(timshel) 즉, '너는 너의 죄를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불행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수 없는 얄팍한 존재이기에 주고받는 사랑, 분노, 슬픔마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애덤은 자신을 향한 칼렙의 사랑을 전쟁을 이용하는 비열함으로 취급한 것이다. 공상가뿐이었던 새뮤얼 헤밀턴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세속적이고 계산이 밝아 가족의 대소사를 처리하고자 돈을 모으던 윌리엄 헤밀턴만이 자기와 비슷한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칼렙을 이해할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현실을 마주해야만 한다. 나의 사랑과 우정이 추한 것으로 매도되기도 하고 나의 도덕적 결함과 우둔함이 순종, 순수 같은 가치로 포장될 수도 있다. 우리는 기대와 다른 현실을 마주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기대와 다른 현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바꾸어나갈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다. 기대와 다른 현실에 좌절해 죄를 저지를 수도 있지만 죄를 반성하거나 반성하지 않는 것도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렇다면 <성서> 속 아벨과 <에덴의 동쪽> 속 애덤, 아론은 이런 주제 의식을 카인, 찰스, 칼렙을 통해 보여주기 위해 이용된 소모적인 인물이었던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 현실은 기대와 다를 수밖에 없다. 기대보다 안 좋을 수도 좋을 수도 있다. 기대보다 좋지 않은 현실을 마주해야 했던 이들이 카인, 찰스, 칼렙이며 기대보다 좋은 현실을 누린 이들이 아벨, 애덤, 아론이다. 기대보다 좋지 않은 현실만을 마주하는 것은 당연히 비극이나, 기대보다 항상 좋은 현실만을 누리는 것은 희극인가? 어쩌면 이 역시 비극일지도 모른다.


    기대보다 항상 좋기만 한 현실이란 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항상 좋기만 한 현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건 당신이 아둔하거나 작정하고 속이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뜻이다. 기대보다 항상 좋기만 한 현실이란 건 사실상 현실인 척 위장하는 환상일 뿐이다. 엄마가 마을의 유명한 창녀라는 걸 알게 된 아론은 기대보다 항상 좋기만 한 현실을 누려 왔기에 현실의 비극적인 면을 맛보자마자 바로 무너져 내린다. 그에 반해 기대보다 좋지 않은 현실만을 마주해 왔던 칼렙은 케이트를 마주하곤 자신의 음흉함의 기원을 이해하면서도, 부모와 자식은 별개의 존재이기에 자신은 음흉하지 않게 살 수 있다고 그렇게 살아보겠다고 다짐한다. 칼렙은 진실 속에 숨어있는 섬뜩한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견했지만 아론은 그렇지 못했고 이것이 아론의 비극이자 시련이었다.


    성서 속 하나님은 사실 카인과 아벨 둘 다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자신의 말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되바라진 아담과 이브의 자식들을 시험하고자 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카인에게는 기대보다 못한 현실을, 아벨에게는 과분한 가짜 현실을 쥐어줌으로써 각각에게 서로 다른 시련을 선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감히 이런 깊은 뜻을 모르는 우매한 카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망친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가짜 현실이라는 시련 앞에서 아벨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어졌다.


    그렇다 하나님도 진짜 몰랐던 거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천방지축인지, 기대보다 못한 혹은 더한 현실 앞에서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그로 인해 어떤 죄를 짊어지게 되는지 정말 몰랐던 거다. 그렇기에 정말 카인이 죄를 다스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카인에게 '너는 죄를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카인이 여생 동안 죄를 다스릴 수 있을지 아주 흥미롭게 지켜봤을 것이다. 그리고 카인의 후예인 우리들 역시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사랑스럽겠는가. 서로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저 바보 같은 피조물이 불쌍하고 가여우면서도, 동시에 자기의 선택으로 미래를 바꾸어 가며 죄를 짓기도 하고 죄를 뉘우치기도 혹은 죄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재밌게 바라보고 있을 것 같다.


    기대보다 못한 현실에 너무 실망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그리고 기대보다 좋은 현실에 너무 기뻐하지도 않고 싶다. 당연히 행운이 있을 수 있지만 행운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건 내가 지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뭐가 됐든 기대 이하 혹은 이상인 현실 모두 다 타인의 의지가 아닌 오로지 나의 의지로, 내 선택으로 만들어진 현실이길 바란다. 하나님도 모르는 나의 선택이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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