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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정 Feb 28. 2024

동시의 기쁨

<<기뻐의 비밀>> 이안. 2022. 사계절.



<어쩌다가>  


해바라기밭

키 큰 해바라기들 사이에

어쩌다가

백일홍 하나 그루가 자란다 

    

해바라기들은 훌쩍

하늘 높이까지

키가 자랐다     


해바라기들 사이에서

백일홍은,     


아무리 커 보았자

키가 해바라기 허리에도 못 미치는

백일홍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생각한다     


나는 뭐지? 뭐였더라?

머리가 빨간 꽃으로 막 터질 것 같은데     


아직은

아닌가?

아닌가?                    




  ‘동시’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짧은 글, 쉬운 언어, 운율, 리듬, 의성어와 의태어. 아이들이 읽을 수 있게 이해하기 쉬운 말들로 쓰여진 짧은 시를 동시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어느 정도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라 또 누구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나도 그랬거든요. 그래서 어린 시절 글쓰기 대회에 나가서 “울긋불긋 단풍잎 / 돌돌돌돌 굴러가는 낙엽 / 동동동동 발구르는 가을” 과 같은 동시도 썼고, 나중엔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과 동시집을 만들기도 했어요. 아이들의 입에서는 늘 멋진 동시가 나왔어요. 아이들은 그저 자신의 말을 글로 옮겨 쓰기만 하면 되었어요. 참, 아이들이 쓴 시는 어린이 시라고 부른다죠. 그런 어린이 시를 읽으면서 동시 참 쉽다. 이렇게 생각했나봐요. 우리들은 늘 아이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더 동시를 만만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구요.

  그러다가 작년에 교사로서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었어요.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놓이자 그동안 쌓아온 교사로서의 자부심, 교육에 대한 가치관 이런 것들이 다 부질없다 느껴졌어요. 교사의 길을 그만두려 했었죠. 그런데 그때 동시가 저의 손을 붙잡아 주었어요. 그리고 동시를 따라 따라 걷다보니 <동시마중> 잡지도 구독하며 시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현 동시의 위치도 알게 되었어요. 그때 마침 <동시마중> 잡지의 편집자이자 시인인 이안 선생님이 쓴 <천천히 오는 기쁨>이라는 평론집도 읽게 되었죠. 솔직히 말하자면 동시를 잘 모르는 만큼 이안 시인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어요. 그런데 평론에 등장하는 김개미, 송찬호, 김성민, 김준현... 이 시인들이 쓴 동시집을 한 권 통으로 읽게 되는 행운을 얻었죠. 아마 여러분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시인들일 수 있어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만큼 그림책이나 동화만큼 아직 동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마흔이 넘어 만난 우리나라 동시의 세상은 많이 확장되어 있었어요. 유치한 말놀이를 하며 어른이 만들어놓은 동심에 갇혀있는 어린이 화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깊게 사유하고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어린이가 있었어요. 때론 시인이 직접 전면에 나서서 어린이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동시를 즐기는 어른에게도 위로도 해주더라구요.

 말이 길어졌지만, 저에게 있어서 <기뻐의 비밀>은 동시가 무엇인지 동시로 말해주는 동시집이었어요. 조금 어렵나요? 그럼 아래의 이 시를 읽어보겠어요?





<아홉 살 시인 선언>     


난 결심했어 시인이 되기로

선생님이 그러는데 시는 아름다운 거래

난 다른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다는 거야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

안 아름다울 순 없잖아?

시인에게는 연필과 수첩만 있으면 된대

그게 시인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무기라는 거야

그 둘만 가지고 세상과 맞서는 거지

아름답지 않니?

백 살까지 쓰고도 남을

연필과 수첩을 모아 두었어

나는 나를 아껴 쓸 거야

자면서도 읽고 쓰고 바라볼 테야

글씨는 작을수록 좋아     


                                       *아홉살에 「연필과 수첩과 시인」이란 멋진 시를 쓴 고현주 어린이에게.




 어때요? 시는 아름다운 거래요. 그리고 연필과 수첩이 세상과 맞설 절대적 무기라고 말해요. 나는 이 시를 읽고 내가 왜 동시가 좋아졌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연필과 수첩을 들고 나도 세상에 맞서기로 했죠. 그래서 동시를 써서 시인이 되겠다 결심했죠.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세상에 맞설 힘을 주기 위해 동시를 알리겠다 이런 다짐도 하게 되었죠.

 하지만 그게 어디 쉽나요. ‘손녀가 된 소년에 대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백 살까지 계속 쓰고 또 써야 된대요. 그리고 이미 너무 훌륭한 동시들이 세상에 나온 거 있죠! 그렇지만 나도 나만의 이야기가 있고, 아직 무엇을 말해야 할지 잘 모를 뿐이었죠. 

 <어쩌다가>의 시를 읽으면서 동시를 쓰고 있는 나를 보았어요. 기라성 같은 시인들의 동시를 읽고 배우면서 동시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좋은 동시는 이미 너무 많고, 그만큼 내가 쓸 이야기가 줄어든다 생각했어요. 동시를 깊게 알아갈수록 ‘나는 시를 쓸 수 없나? 나는 동시를 즐기기만 해야 할까?’ 이런 고민들로 조금 힘들었거든요. 하지만 그 높은 해바라기들 사이에서도 ‘나는 뭐였더라? 뭐였더라?’를 고민하는 백일홍을 보았어요. 빨간 꽃을 막 터트릴 것만 같은데 아직은 아닌가? 아닌가? 하는 백일홍의 고민이 나와 너무 닮았거든요. 해바라기를 보며 해바라기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빨갛게 꽃 피울 백일홍의 꿈. 끝까지 자신의 꽃을 피울 때까지 치열하게 고민할 백일홍을 응원하고 싶어졌어요.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혹시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마음에만 담아둔 꿈이 있나요? 동시는 동심을 닮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어요.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을 기르고 싶다면 선생님들, 꼭 동시를 읽어보세요. 동시집 한 권 읽을 시간을 내어보세요. 지금 교실에서 나와 학교 도서관 동시 코너를 가면 손때도 묻지 않은 여러권의 동시집이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그 중 마음에 드는 제목의 동시집 한 권 꺼내 휘리릭 넘기다보면 선생님 마음을 툭! 하고 건드려줄 동시가 나타날 거에요. 그동안 잊고 지냈던 꿈들도 깨어날지 몰라요. 각각의 선생님의 꿈들은 이 시집 등장하는 백일홍의 꿈일수도 있고 제비꽃의 꿈일 수도 있고 토끼풀의 꿈일 수도 있겠죠. <사과꽃도 모르고 모과꽃도 모르는> 시처럼 앞으로 만날 동시들을 통해 기분 좋은 순간을 만나기를, 그리고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뻐의 비밀>>을 통해 동시와 가까워지기를 바랍니다.



사과꽃도 모르고 모과꽃도 모르는


사과꽃 꽃말이 글쎄

'유혹'이라는 거야 말이 되니 말이


사과꽃을 바라다보며

모과꽃들이 수군거렸습니다


모과꽃 꽃말이 글쎄

'유혹'이라는 거야 말이 되니 말이


모과꽃을 바라다보며

사과꽃들이 수군거렸습니다


모과꽃들은 탐스런 사과를 생각하느라

가을까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과꽃들도 향기로운 모과를 생각하느라

가을까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주 멀리서부터 가을이 와서


노란 모과에서는 사과향이 조금 맡아지고

빨까 사과에서는 모과향이 조금 맡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왜 그런지

사과꽃도 모르고 모과꽃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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