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행시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나요? 90년대 말 티비 예능 프로에 종종 등장하던 삼행시 코너가 떠오른다면 저랑 같은 세대! 재치와 순발력으로 무장한 개그맨(개그우먼)에게 삼행시는 그들의 장점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개그 소재이기에, 친구들과 삼행시 짓기를 하다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다 새삼 그들의 센스에 엄지 척을 날리기도 하며 놀던 때가 그리워집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2020년, 방송인 유병재 삼행시집 《말장난》이 출간되었어요. 말장난이라 치부하기엔 읽는 이에게 큰 위로가 되는 그의 삼행시. 낱말의 개수에 따라 이행시, 삼행시, 사행시...... 가 되는 N행시는 얼굴에 점하나 찍으면 다른 사람이 되는 드라마의 한 여주인공처럼 성만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책에 담기니 또 다른 깊이로 읽히더라고요. (꼭 한 번 검색해 보시길요!)
그럼, 동시에서 삼행시는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우연의 일치인지 박성우 시인의 동시집《삼행시의 달인》도 앞의 책과 같은 해에 출간되었더라고요! 그럼 아이의 모습과 생각이 담겨있는 삼행시를 한 번 살펴볼까요!
참외
참아도 참아도
외롭고 심심해서 힘들 때가 있다
89쪽.
구아버
구구단을 외우는 건 힘들어
아, 구구단을 안 외우고
버틸 수 있을까?
73쪽.
어린이의 고뇌가 느껴지나요? 놀이가 본능이자 존재의 이유인 어린이 화자의 "참아도 참아도/ 외롭고 심심해서 힘들 때가 있다"는 고백이 마냥 투정으로만 들리지 않네요. "아, 구구단을 안 외우고/ 버틸 수 있을까?" 묻는 건 또 어떻고요. 보편적 어린이의 목소리가 어떨 땐 참 귀합니다. 이런 목소리는 어떤 한 어린이로 특정 지을 수 없기에 어린이 독자에게 더욱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니까요. 함께 읽은 후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로 삼행시를 지어본다면 어떤 다른 목소리가 들리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공책
공책에 그림을 그리면 엄청 신나
책에 그림을 그리면 엄청 혼나
36쪽.
연필
연필이 제 맘대로 나가 놀다 심이 부러졌대
필통 속에 얌전히 있었으면 그럴 일 없었을 텐데
31쪽.
'공책'과 '연필'로 쓴 학용품 이행시를 읽다 문득 질문이 생겨났어요. 왜 책에 그림을 그리면 혼나는 걸까, 연필은 부러진 채로 있으면 안되는 걸까 하고요. 자신만의 잣대로 어린이를 통제하려는 어른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 듯해요. 책에 낙서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라는 건 누구의 생각인 걸까요. 연필은 쓸 때 빼고는 잘 깎인 모습으로 필통 속에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것도 누가 만든 규칙인 걸까요.
어른도 분명 어린이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벽에 마음껏 낙서하고 뛰어놀고 싶을 때 언제든 나가 놀던 시절. 어린이라는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허락되던 놀이의 시간은 점점 사라지고, 부모나 선생님의 시선 안에 갇혀 물어보고 나서야 행동하는 어린이가 마치 시 속 연필 같습니다. 필통 속 잘 깎인 연필 같은 어린이가 교실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걸 선생님도 느끼진 않나요?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돈에 들어 있다
사랑스러운 내 세뱃돈에 들어 있다
임금님보다 멋지게 5만 원짜리에 들어 있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엄마가 가져갔다
뭐니 뭐니 해도 삼행시는 읽는 즐거움이겠죠! 우리 반 아이들이 제일 재미있다고 뽑은 삼행시는〈신사임당〉이에요. 아주 보편적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이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감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제안했어요. 우리 반을 추억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삼행시를 써보자고요! 한 번 보실래요? (아이들이 쓴 것을 그대로 옮겨 썼어요)
우리반의
리코더 실력에
반해버렸다
좋은 음정은
아 좋아~~~
요~ 신난다!
-박연*
수학을 왜하지?
학생에 기본이니까
-박찬*
이렇게 동시 잘 쓰는
반은 삼학년 이반
-김동*
크리스마스는
리본으로 포장해도 되는 날
스륵스륵 써지는 시
마법처럼 좋은 시들이 우르륵
스륵스륵 멋진 시가 나오는 날
-이은* 외 3명
동시집을 읽는 선생님
시를 쓰는 우리 반 친구들
집에 가야하는 친구들이 집가기 싫다는 친구들
-양윤*
이 짧은 삼행시가 우리 반을 추억하게 되는 즐거운 놀이의 시간으로 채워주었어요. 모두 첫 음을 큰 소리로 부르면 제가 혹은 삼행시를 쓴 아이가 한 행씩 읽었는데 어찌나 신나고 즐거웠던지요. 목청껏 소리 지르던 아이도 어느새 삼행시 짓기에 푹 빠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추억을 놀이하는 방법, 삼행시. 선생님의 올해는 어땠나요? 짜증 나고 억울했나요? 속상하고 화가 났나요? 외롭고 심심했나요? 즐겁고 행복했나요? 선생님과 함께 지낸 아이들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요?
한 해가 끝나가기 전 아이들과 삼행시 짓기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삼행시는 누구나 언어라는 장난감으로 놀면 되니까요.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그렇게 표현해 보자고요. 속상한 건 속상한 대로, 좋은 건 좋은 대로 그렇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