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중경 삼림》을 아시나요? 영화에는 만우절 날 헤어진 여자 친구를 기다리며 5월 1일이 찍혀있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는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4월의 마지막 날, 더 이상 유통 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팔지 않는다는 가게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죠.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동안 쌓아놓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조리 먹어치우며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사랑에도 유통 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변해버린 여자의 마음과는 달리, 유통기한 없이 지속되리라 믿었던 남자의 사랑을 파인애플 통조림의 유통기한에 비유한 이 에피소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 기쁨, 슬픔과 같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에 과연 유통 기한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위의 동시 속 화자는 '생각엔 유통 기한은 없다'고 말해요. "어제는 몇 년 전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오르고/ 오늘은 아주아주 어렸을 때 일이 생각났"다고요. 저도 매우 동의합니다. 작년에 가르쳤던 아이들이 방학이 된 지 보름이 지났는데 여전히 생각나더라고요. 물론 긍정적으로요.
좀 더 오래된 생각을 꺼내볼까요. 얼마 전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식 날, 설레는 마음으로 손 꼭 잡고 교문을 들어서던 아들의 입학식이 마치 어제 같은 기분. 아니, 심지어 양갈래 머리를 하고 초등학교 입학하던 내 모습도 같이 떠오르는 까닭은 도대체 뭘까요.
하지만 좋은 생각만 늘 떠오르진 않죠. 왜 좋지 않은 생각들은 자주, 그리고 더 생생히 떠오르는 걸까요. 아마 화자도 유통기한이 없는 생각때문에 힘든 건 아닌지. 유통 기한이 지난 쓰디쓴 약도, 작아져버린 옷도 버릴 수 있는데 생각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버려질 수도, 사라지지도 않으니까요. 영화 속 남자처럼 파인애플을 다 먹어치워 버리는 행동처럼, 간절히 버리고 싶은 생각을 혹시 갖고 있진 않은가요?
마음 쓰기
마음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아
닳아질까 봐
아껴 둔 것처럼
달아날까 봐
숨겨 둔 것처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마음을 쓰지 못했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면 어떨까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마음을 쓰면 쓸수록
또 쓰고 싶어졌어
18쪽.
글쓰기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해요. 무엇이든 끄적이다 보면 내면의 자아가 툭 하고 튀어나올 때가 있죠. 혹시 일기를 쓰면서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줄줄 따라나온 적은요? 작년 이맘 때 서 너달 동안 '모닝페이지'를 한 적이 있어요. 모닝페이지란 눈을 뜨자마자 의식의 흐름대로 3쪽 정도 쓰는 글쓰기를 말해요. 비록 동시를 함께 배우는 수강생들과 하는 과제 중 하나로 시작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너무 좋았거든요. 그때의 기억 덕분에 올해 초 다시 모닝페이지를 시작해 보려 수첩을 준비했어요. 공개적인 곳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잖아요. 하지만 누구의 평가도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써 내려가는 글은 또 다른 차원의 글쓰기라는 것.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쓰는 모닝페이지의 시간이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명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요.
이 시에서 재미난 부분은"마음을 쓰면 쓸수록/ 또 쓰고 싶어 졌어"라는 마지막 연처럼 '마음을 쓰다'라는 중의적 표현이에요. 마음을 쓴다는 것은 '내 마음을 글로 쓴다'는 뜻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쏟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니까요. 마음이 쓰이는 사람 또는 일이 있다면 조금 용기를 내어보라는 말로 들리기도 해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건 내 마음이니까. 용기란 솔직함의 다른 말이기도 하니, 저도 조금 더 솔직하게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짠단짠
달달한 도넛을 먹으면
짭짤한 라면이 생각나고
매콤한 국물떡볶이를 먹으면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떠오른다
우산도 없이
소나기를 맞은 날
빗물을 닦아 주며
네가 건넨 말
괜찮아?
내 마음도
단짠단짠
67쪽.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힘든 일도 그 시간을 잘 견디면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고, 즐거움을 쫓아 지내던 시간이 나중엔 후회되기도 하잖아요. 무조건 좋고, 무조건 나쁘다.라는 판단은 잠시 내려놓고 싶어요. 지금 제 마음이 어떠냐고요? 좀 우울해요. 마흔이 넘도록 제대로 이룬 것 하나 없고, 여전히 어린 시절에 겪었던 트라우마에 종종 시달리기도 해요. 그치만 쑥쑥 커가는 아들과 미우나 고우나 내 편이 되어주는 남편을 보면 그동안 살아온 세월들이 헛되지 않았음에 위로를 받아요. 재작년엔 교직에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작년엔 선생님이라서 참 행복했거든요. 맞아요. 우울한 나도, 행복한 나도 모두 나인걸요. "달달한 도넛을 먹으면/ 짭짤한 라면이 생각나고// 매콤한 국물떡볶이를 먹으면/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떠오"르는 것처럼요. 정말 단짠단짠 한 내 마음, 단짠단짠 한 인생.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시를 먹을 때
눈치 보지 말고
한 글자 한 글자
입에 넣지
쉼표도 마침표도
놓치지 말고
찍어 먹자
천천히 꼭꼭
씹어 먹자
형식 따위는
벗어던지고
주제 따위는
잊어버리고
입맛대로
마음 가는 대로
맛있게 먹자
72쪽.
김응 시인의 동시집 《마음속 딱 한 글자》는 제목처럼 '마음'을 드러낸 동시를 만날 수 있어요.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을 담은 동시도요. 제가 동시를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동시를 쓰는 이유는 "마음 가는 대로" 읽고 쓸 수 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쫓기듯 읽을 필요도 없죠. 마음 가는 대로 동시집을 한 권 꺼내서, 마음 가는 페이지에 있는 동시를 읽는 것. 그리고 내 마음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형식 따위는/ 벗어던지고/ 주제 따위는/ 잊어버리고" 마음 가는 대로 읽는 것.
2025년 1월, 선물처럼 찾아온 동시집 《마음속 딱 한 글자》를 읽으면서 찌푸려 있던 얼굴 표정이 펴지고, 마음의 그늘이 걷히는 기분을 느꼈어요. 더욱 반가운 건 아이들과 기쁘게 나눌 동시집이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 지금 제 마음은요, 마음속의 한 글자, 아니 두 글자인 "동시"랑 더 놀아보고 싶어지네요. 그런 의미에서 방학 동안 저랑 함께 "놀다 가게" 옆에 있는 '동시 읽다 가게'에 들려보는 건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