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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Jun 23. 2021

낡게 되는 것과 포기하는 것

넘치던 마음도 변하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옷과 신발이 낡아서 버리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일단 가지고 있는 양이 적지 않고, 또 그것들을 끊임없이 돌려가며 입고 신는 스타일이라 낡고 해지는 일이 거의 없다. 오히려 몇 년이 지나도 새 것 같은 일이 더 많았다. 뿐만 아니라 몸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체중도 크게 변하지 않는 편이라 안 맞아서 못 입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버려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 해, 매 계절 새로운 옷과 신발은 사고 있으니 결국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 않는 꼴이다. 양은 계속 늘어만 가고, 그러므로 낡아지는 일은 더욱더 희박해진다. 그런데 일 년 전쯤 산 운동화가 하나 있다. 어디선가 우연히 보고 맘에 들어 이리저리 찾아다니면서 고민했던 운동화. 특별한 건 하나도 없지만 평범하고 무난해서 어디에나 잘 어울리던 운동화였다. 지난 일 년간 찍힌 사진을 보니 그 운동화를 신고 찍힌 사진이 많다. 그만큼 애정 했나 보다. 애정 하다 보니 자주자주 신었고, 자주 신다 보니 다른 신발에 비해 더 많이 낡아버렸다. 최근에는 제발 그 운동화 좀 버리고, 그렇게 좋으면 차라리 똑같은걸 하나 새로 사라는 말을 들었다. 뽀얗게 새 것이던 것이 뿌옇게 헌 것이 되고, 낡고 해져서 버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쉽게 버리지 못하겠다. 이제 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비 오는 날 막 신으면 되지 모.'라고 생각하고 도로 내려놓기도 했다. 똑같은 운동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른 신발이 많은데도 왜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이라고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앞 글의 대상을 신발이 아니라 열정이나 꿈으로 바꿔서 써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열정이 시들해지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일단 가지고 있는 꿈이 있고, 또 그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열정을 쏟기 때문에 사그라지는 일이 거의 없다. 오히려 몇 년이 지나면서 열정이 더욱 커져서 더 알고 싶은 일이 많았다. (중략) 지난 일 년간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만큼 애정 했나 보다. 애정 하다 보니 더 많이 노력했고, 더 많이 노력하다 보니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최근에는 제발 그만 좀 하고, 포기하라는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열정만 넘치던 마음이 이만큼 성장하게 되었지만 아직 뚜렷한 결과 없이 낡고 해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쉽게 포기하지 못하겠다. 이제 포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언젠가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 모.'라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길도 많은데 왜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대상을 바꾸고 보니 영 어색하다. 열정이나 관심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다. 처음과 같지 않고 낡아버린 마음 앞에서 가슴이 아프고, 서글퍼진다. 특히 어느 날 문득 그 마음을 내 안에서 발견했을 때 너무 슬프다. 처음 시작하는 일,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의 만남, 새해의 다짐이나 혹은 거창한 계획 앞에서 언제나 열정은 넘치도록 흘러나오고 뭐라고 해낼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말라간다. 올해 초, 펜 드로잉의 매력에 빠져 잉크며 펜이며 이것저것 사들이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왜 무언가를 시작할 때 사들이는 행위로 시작하는지 알 수 없다.) 대단한 결과는 아니더라도 스케치북 한 권 정도 연습을 하면 꽤 괜찮은 작품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스케치북 한 권은커녕 몇 번 연습해보지도 못하고 뽀얗게 먼지만 쌓이게 되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할 일이 많아서 등 온갖 이유들이 합리화에 동원됐지만 결국 그건 낡아진 것이다. 그 열정도, 꿈도 호로록 타버려 까맣게 변했다. 먼지 쌓인 잉크병을 보면서 나는 또 내 안에서 낡아버린 마음을 보았고 역시나 슬펐지만 아직 포기하진 않았다. 낡은 마음 깊숙한 곳에 언젠가 꼭 펜 드로잉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이 씨앗처럼 숨어있다. 낡아버린 신발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이 이어졌다는 게 웃기기도 하지만 애정을 갖고 있던 무언가를 낡았다는 이유로 버리는 게 어쩐지 포기하는 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조차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넘치던 마음은 시간이 가면서 변하게 된다. 

하지만 낡고 해지는 것과 포기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것이 오늘도 낡은 신발을 들었다 놓는 이유이며 집이 점점 좁아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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