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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Jul 07. 2021

걱정 같은 단정

섣부른 판단에서 나온 무례함

아나운서가 되어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아나운서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단지 TV에 나와서가 아니라 그들의 지적이고 재치 있는 모습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래희망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연예인이나 승무원 같은 느낌이었을까, 아무튼 나에게는 그런 직업이 아나운서였다. 사실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경쟁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로 노력, 시간, 그리고 경제적인 부분까지 많은 투자가 밑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도전해 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연하게 꿈을 꾸곤 했다. 말 그대로 '장래희망'인데, 희망 정도는 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그냥 가슴속에 담아둔 작은 씨앗 같은 희망이었는데 그 희망에서는 어느새 뿌리가 나고, 싹이 올라오게 되었다. 작은 떡잎이 고개를 내밀 때쯤, 말하기는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주위에 슬쩍 꺼낸 적이 있다. 

 "나 아나운서 시험 한 번 봐볼까."

속마음을 감추고 관심 없는 척, 최대한 심드렁하게 말을 꺼냈다. 어째서인지 그렇게 말을 해야 덜 창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게 꺼낸 나의 말에 돌아오는 반응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오직 한두 명의 지인들만이 나에게 열심히 준비해서 한번 도전해 보라며 응원을 해줬다. 그 밖에는 진지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나한테 날개가 생겼으면 좋겠어.'급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은듯한 반응이 상당히 많았고,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걱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나운서는 아무나 하는 줄 아느냐, 아카데미 안 다니고는 절대 아나운서가 될 수 없다더라, 아나운서 아카데미 다닐 형편이 되느냐 (형편 걱정까지), 아나운서는 끼가 많아야 된다, 대학 다닐 때부터 준비를 해야 되는데 이미 너무 늦었다 등과 같은 아나운서의 자질에 대한 걱정부터 아나운서를 하려면 피부과에 다녀야 하고 교정과 치아미백은 필수라더라 같은 외모에 대한 걱정까지... 애써 가벼운 척한 나의 뉘앙스 때문인 지는 몰라도 그들의 걱정은 한순간에 희망을 절망으로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내가 도전해야 할 이유보다 도전하지 않은 이유만 가득했다. 


이쯤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이겨내고 노력하여 당당히 아나운서가 되었다.'로 마무리되었다면 참 멋진 결말이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잎이 여러 장 나온 다음이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막 흙을 뚫고 올라오던 떡잎은 많은 걱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씨앗 속으로 쏙 숨어버렸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생각해 보니 그들은 걱정 같은 단정을 하고 있었다. 걱정같이 말했지만 '넌 안될 거야.'라는 단정을 애써 에둘러가며 걱정인 듯 나에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이미 그들의 반응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존심을 다치지 않기 위해 심드렁하게 말을 꺼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단정이 더 현실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먼 훗날까지 이루지 못할 무언가를 붙잡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을 나를 위한 진심 어린 걱정이었을지,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나를 보면서 내린 나의 가능성에 대한 판단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섣부른 판단에서 나온 무례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의 간절한 희망 앞에서 걱정을 가장한 차가운 단정을 쏟아낸 적은 없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또 나의 섣부른 판단에서 나온 무례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지도 되돌아보았다. 


걱정 같은 단정을 듣고 떡잎은 씨앗 속으로 숨어버렸지만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얼마 후 아나운서 채용 공고가 떴고, 서류를 접수해서 1차 카메라 테스트까지 받게 되었다. 시험 당일 방송국에는 걱정대로 진짜 아카데미를 다니는 (그들만의 그룹 같은 게 있었다), 끼가 넘쳐 보이는, 피부가 너무 좋고 완벽한 치아를 가진 지원자들이 캐리어를 끌고 줄줄이 나타났다. 강남의 어느 샵에 다녀온 듯한 헤어와 메이크업을 한 채. 나는 할 수 있는 나름의 준비를 했고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그리고 TV로 보던 진짜 아나운서들 앞에서 프롬프터를 보며 뉴스 원고를 읽었다. 내 마음속의 씨앗은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 보관되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포기했다면 그 씨앗은 여전히 마음속에 숨겨진 채, 내가 갖지 못한 무언가로 인해 포기해야만 했던 아픈 기억이 되었을 것이다. 포기는 남의 걱정이 아니라 나의 인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선택의 길 앞에서 머뭇거리는 순간이 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의 결정은 더 크게만 느껴지고, 그래서 더욱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더군다나 나는 모험형보다는 안정형에 가까워서 절대로 눈감고 뛰어가는 일은 하지 못한다. 알아보고 확인하고 찾아보고, 이런 과정을 거쳐 나 스스로의 결론에 도달하지 않으면 선뜻 뛰어들지 못한다.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되겠지.'가 아니라 '이제 됐다.'가 되어야 비로소 움직이는 것이다. 이 시간에 혼자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면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는데 당연히 확신이 없는 이 순간에는 다른 이들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게 된다. 이때 걱정을 가장한 단정들은 가능성의 한계를 만들어 버린다. 그 단정은 오로지 개인의 판단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에게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가치와 가능성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듯이, 걱정을 가장한 단정 또한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그 무례함으로 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하면 안 되는 이유보다는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채워야 할 조건보다는 갖고 있는 씨앗을,

여건보다는 의지를 

그리고 쑥스러움 속에 감춰진 간절함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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