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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Jan 25. 2021

꼰대와 미성숙 사이

멘토와 성숙의 어디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설명을 하고 또 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신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나이가 들면 이렇게 되는 건가.


특히, 본인이 어떤 이득을 보았거나 성취감을 느꼈던 결정이라면

 '해봤고, 틀리지 않았던'  절대적인 정답으로 믿고 있어서

절대 바뀌지 않는다, 타인이 바꿀 수가 없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분들의 세월은 분명히 가치 있겠지만

그 시간 동안 쌓인 경험을 마치 '진리'로 생각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는 시간의 두께만큼 곤란하게 느껴진다.

진리는 불변하는 것이지만

그 경험의 대부분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 경험, 기준을 정답이라 생각하고 고집한다.

다른 방향, 다른 방법, 다른 가능성에 대한 여지가 거의 없다.

꼰대는 노련한 것이 아니라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최근에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젊은 꼰대들도 있다.

짧은 인생으로 인해 부족한 경험이 마치 돌연변이처럼 진화한 것 같다.

'경험 부족 - 선택지 부족 - 여지없음 - 고집' 이런 진화 과정을 거친 것일까.

꼰대를 보면 보통 '나는 나이 들면 저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젊은 꼰대를 대할 때는 좀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 또한 곤란하다.


꼰대가 경험에서 비롯된 본인의 기준이 고착화된 것이라면

미성숙은 그 기준이 불명확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뚜렷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나'와 '남'의 기준이 다르고 모호하다.

이런 경우에는 극단적인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첫 번째는 불분명한 기준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인을 기준으로 삼고

끊임없이 남의 눈치를 보고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다.

자아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다.

두 번째는 오로지 '나' 위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에 비하면 남들은 모두 틀리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타인을 잃어버린 경우로, 꼰대와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양상은 복합적으로 나타나 상대방을 당황하게 한다.

누군가 힘든 얘기를  털어놓았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이런 적도 있어.' 식으로 반응하여

속을 다 뒤집어 놓기도 하고

'그 정도는 힘들어도 할 수 있다'라고 위로 비슷한 말을 하다가도

정작 본인이 같은 상황이 되면 이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불평을 한다.

그러면서 내 결정에 대한 평가는 다른 사람의 인정에서 찾기도 한다.

꼰대는 감사에 인색하고, 미성숙은 칭찬에 인색하다.

꼰대는 허리를 숙이기 힘들고, 미성숙은 고개를 드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단단한 듯 무르고, 꼿꼿하지만 어디에나 맞출 수 있는 사람,

남을 보듯이 나를 재고, 나에게 하듯이 남에게 관대한 사람,

뿌리는 흔들리지 않지만 가지는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춘 사람,

소나무이자 대나무인 사람이고 싶다.

그렇게 해서 내가 도달하고 싶은 곳은

멘토와 성숙의 어디쯤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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