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또 다른 말.
그런 날이 있다. 한겨울에 잠깐 집 앞 슈퍼에 가려고 슬리퍼를 신고 나왔을 때. 칼바람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발목을 감싸고 스치듯 나가며 발을 아릴 때. 너무 발이 시려서 발을 감싸려고 손을 패딩 주머니에서 빼는 순간 핸드폰이 같이 빠져나와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찍었을 때. 너무 아파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미세한 신음소리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추운 날. 그런 날 문득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외할머니의 육개장이다.
2006년, 그 이름마저도 '훨씬 천천히 간다는 달' 3월.
입대하고 이틀쯤 지났을까. 입고 있던 사복과 소지품들을 박스에 넣어서 집에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보내는 한 통의 편지도 함께. 뭐라 쓸까 고민하다가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 군대 보낸 아들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집밥에 대한 단상을 고이 눌러 담아서.
"어머니, 훈련소 식당에서 하루 3끼 먹고 있는데 너무 맛있습니다. 산속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새벽에 조깅 후 부대원들과 함께 부대끼며 먹는 아침 맛은 꿀맛이죠. 그리고 여기 식당에서 나오는 김치가 또 예술입니다. 30년 전통 김치찌개 집 2대 할머니 주인장이 직접 장독대에 묻어둔 3년 묵은지같이 아삭하면서 적절하게 새콤한 것이 그야말로 장까지 살아서 가는 유산균 덩어리입니다. 이 김치는 그동안 20년간 집에서 먹던 어머니 손맛에 대한 기억마저 장까지 다이렉트로 보내버렸습니다.(이하 생략)"
그랬다. 우리 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다. 아버지가 당시 급하셨는지 얼굴도 안 보고, 음식 솜씨도 안 보고 데려오셨다. 그리고 늘 부지런하신 어머니는 뱃속에 나까지 미리 챙겨 오셨다. 안타까운 사실은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진전이 없어 보인다. 35년째 부지런히 하고 있는 다이어트처럼.
'사람이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다.'라고 했던가. 나에겐 어머니의 어머니가 있었다. 바로 외할머니의 존재다. 외할머니는 '맛있는 음식' 그 자체였다. 가끔 어머니가 외할머니의 친딸이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이모들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아무튼, 외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감히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 현재 장모님이 무섭게 그 뒤를 바짝 뒤쫓고 계신다. 물론 장모님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시겠지만.
월드컵 하면 치맥이고, 결혼식 하면 잔치국수고, 장례식 하면 육개장이다. 어쩌다가 육개장이 장례식장의 대명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의 무게를 그나마 조금 덜어주는 건 따뜻한 육개장과 넓은 주차장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때부터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가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해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충남 논산에서 작다고 하기엔 조금 큰 듯한 식당을 하셨다. 버스터미널 바로 코앞에 위치한 식당은 논산 훈련소 입소식이 있는 날 즉, 입대하는 날마다 붐볐다. 입대를 앞두고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초조한 사람들, 그걸 지켜보는 가족들, 그 모든 걸 몇 년간 지켜봤던 나였다. 하지만 실제 내가 입대할 때는 나 또한 전쟁 같은 입대를 앞둔 수많은 빡빡이들 중 하나의 빡빡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도 했었다. 어쨌든 외할머니의 음식 솜씨와 터미널세권으로 인해 식당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외삼촌이 그 많은 돈을 국밥에 말아먹듯 말아드시지만 않았어도, 나도 이재용 부회장의 복숭아뼈 높이 정도의 재력을 소유하지 않았을까 하는 잡념을 잠시 해본다.
외할머니의 시그니처 음식은 '육개장'이다. 육개장의 어원이 개를 끓여서 만든 개장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관심 없고, 소고기가 들어간 참 맛있는 음식임에는 틀림없다. 팔팔 끓는 솥에 양지를 푹 삶아서 한 김 식혀준다. 그리고 고깃결 방향대로 거침없지만 섬세하게 찢어준다. 큼직큼직하게 썰어진 향긋한 대파와 각종 마늘 등 양념이 버무려진다. 그렇게 푹 끓이고 고기 넣고 또 몇 분의 인고의 시간이 지나면 달걀지단이 올라간 맛있는 육개장이 완성된다. 만드는 과정까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며느리에게도 안 알려줬다는 사실이다.
손님이 뜸해진 시간대나 주말에 설렁탕이나 여러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지만, 유독 육개장이 기억에 강렬하다. 그 빨간 빛깔에서 나오는 후광과 한 숟가락 떠서 넘기면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감칠맛은 글로 표현하는 것마저 사치다. 칼칼하며 매운듯하지만 식도를 타고 넘어간 이후에는 담백하면서 깔끔한 맛이 있다. 두꺼비도 반할 그런 초 깔끔함이랄까. 소고기는 너무 오래 삶아서 질길 법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바싹 익힌 막창처럼 씹는 즐거움이 느껴질 정도로 어금니와 양지의 기분 좋은 밀당이다.
외할머니가 손수 손자를 위해 다시 한번 더 소고기를 찢어서 주셨다. 먹기 좋게 찢어주신다며 손으로 찢고, 그 손으로 쪽쪽 빨아먹고 다시 고기를 집어서 또 찢어주시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고기 반, 외할머니 침 반이었던 것 같다. 아밀라아제 덕분에 고기가 조금은 더 부드러워졌던 것일까.
고사리는 제주도가 유명하고 맛있다지만, 외할머니의 손 재주가 발휘된 고사리가 더 맛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흐물흐물 해지는 커피숍 종이 빨대보다는 뛰어난 텐션을 유지하면서, 먹다가 중간에 잠깐 옆에 놔둔 찰옥수수 알맹이보다는 소프트한 느낌이다. 그리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과 고사리 특유의 향이 입만 가득 맴돌다가 리트머스 종이 색깔 변하듯 쫙 퍼진다. 아무리 맛있다는 육개장 가게를 가도 외할머니의 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언젠가 육개장을 맛있게 먹다가 불현듯 뒤돌아봤다. 당시 눈에 비친 외할머니는 푸르고 곧던 고사리가 말려지고 삶아진 듯, 조금씩 늙고 허리가 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인가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음식과 김치들이 간이 안 맞기 시작했다. 짜거나 혹은 싱겁거나. 그 뒤로 어머니가 집에서 김치를 소꿉놀이하듯 한두 포기씩 담그기 시작했다. 차라리 외할머니의 간 안 맞는 김치가 더 맛있을 정도였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어머니는 김장을 바로 포기하셨다. 그리고 장모님이 김장하실 때 옆에서 거들뿐.
우연히 TV에서 논산 훈련소라도 나오면, 논산 터미널 앞에서 식당을 하셨던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뽀얀 설렁탕과 고사리와 대파가 듬뿍 올려진 빨간 육개장이 잔상으로 남아 눈 앞에서 4D마냥 맛있게 아른거린다. 그리고 요양원 침대에 누워서 마지막으로 내게 눈 맞추던 그 순간, 그 미소가 생각난다. 다음에 또 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조금만 더, 며칠만 더 오래 보고 싶었는데.
2016년 이후로 "영구 없다"라는 말은 가장 슬픈 말이 되었다.
지금은 편안한 하늘나라에 계신 우리 '김영구 외할머니'가 오늘따라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