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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May 12. 2019

(책리뷰)남아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평생을 ‘집사’라는 직업에 혼연일체 되어 살아온 스티븐스가 6일간 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단순해 보일 수도 있으나, 책을 덮은 후 밀려오는 여운과 울림은 엄청나다.


주인공 화자인 스티븐스는 집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엄청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직업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며 업무 성과도 뛰어나다. 직업으로서 가져야 할 미덕인 ‘품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자신만의 철학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영국에 대한 애국심을 넘어 과한 자긍심으로 단단하게 형성된 그 가치관은 스티븐스라는 한 인간이 아닌 집사의 화신으로 보이게 한다. 


아버지의 임종 앞에서도 집사로서의 업무와 태도, 품위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 같은 집에서 일했던 켄턴과의 미묘한 이성적 관계에서도 철저히 감정을 절제하고, 배제하려고 애쓰는 그의 태도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평생을 자랑스러워하며 모셔왔던 달링턴 경은 나치에게 이용당하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무른 ‘아마추어’적인 사람이다.  

중간에 나오는 미국인 루이스 대사가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비판하고 프로페셔널리즘을 찬양하는 모습은 마치 인간적인 태도의 ‘감성’과 직업적인 태도의 ‘이성’을 대변하는 듯하다. 자신과 상반되는 성향을 지닌 주인을 모시면서 자신의 직업적 이성을 고착화한 ‘프로페셔널’ 스티븐스와 주인 달링턴경의 대비되는 역설적 관계는 책의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이다. 크게 보면 1차대전 이후 대두된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이후 냉전으로 표현되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더 나아가 엘리트주의와 민주주의까지 인류 근대사에서 인류가 선택해왔던 가치들이 소설 중간중간 녹아 들어있어 소설의 깊이가 느껴진다.

이런 작은 장치들이 여행 마지막 날 노을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스티븐스의 모습에서 더욱 긴 여운을 남기게 한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품위’를 갖춘 집사가 되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품위‘란 철저히 배제되고 숨겨져야만 했던 요소이다. 성공한 집사로서의 커리어를 가진 대신, 자신으로서의 품위를 갖추지 못하고 노년에 이른 그에게, 남은 것은 예전 켄턴과의 사소했던 나날. 가끔은 투닥대면서 보낸 소소한 나날들에 대한 회상뿐이다. 회상 속에서도 그녀와의 관계에서 있던 작은 일상들에서 자신이 다르게 행동하고, 말했다면…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독백, 끊임없이 일등급 집사로 인정받기 위해 그래야만 했다고 마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정당화하는 모습들이 겹쳐져 마지막 스티븐스의 회상은 더욱 더 깊어 보인다. 


인생에 있어 행복했던 시기를 붙잡고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슬픔 때문일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대부분이 스티븐스일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계기가 켄턴과의 만남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모든 독자는 알고 있지만 그는 아니라고 부정한다. 아니, 그럴 것 같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라는 질문을 되새기게 한다.


한 집에서 같이 일했던 시기에 끊임없이 마음을 표현했던 켄턴의 감정을 외면하고, 피하고,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본심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던 스티븐스가 마지막 그녀와의 대화에서 느꼈을 회한은 책을 읽는 내내 자칫 지루하게 느꼈을 수도 있는 독자의 감정을 마치 자이로드롭을 탄 것처럼 철렁 내려앉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마지막 스티븐스의 다짐은 ‘한 인간으로서 남아있는 생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를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평생을 바쳐온 주인의 명예가 떨어질지언정 그 밑에서 일했던 그의 직업적 진실됨,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한 것을 행한 진심은 바래지 않았다고, 스티븐스는 말한다. 과거의 연인을 놓친 것에 대해서도 후회는 깊게 남지만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며 보낸다. 그리고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 마주할 주인의 유머감각에 부응하기 위해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다짐으로 여행의 마지막 저녁 속에서의 회상을 마친다.  


이시구로는 이 작품을 통해, 스티븐스를 통해, 우리가 살아온 삶이 뒤집혀도 무너지지 않고 딛고 서있는 그 자리에서 저녁을 대하듯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마무리해내고 다시 올 내일 아침을 기대하는 것이 남아있는 나날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자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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