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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Apr 25. 2019

(책리뷰)빨강머리 여인 - 오르한 파묵

빨강머리 여인, 누굴까?

오이디푸스 신화와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의 쉬흐랍과 뤼스템 신화를 바탕으로 한 가족의 가혹한 운명에 대한 내용이다. 파묵은 이 책에서 마치 우물을 파고 내려가듯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 깊은 고찰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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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중산층에서 태어난 젬은 유년시절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타 지역으로 잠시 일을 하러 떠나게 되고, 이곳에서 유년시절의 상징적 아버지인 우물파는 장인 마흐무트 우스타를 만나게 된다. 우스타를 통해 스스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가는 중, 성숙한 빨강머리 여인을 만나 운명적으로 밤을 보내게 되고, 우스타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느끼게 되면서 우물 작업 중 실수 같은 사고가 발생한다. 결국 젬은 오이디푸스처럼 스스로의 운명에서 도망친다.

이후 노력하여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지질공학 전문가가 되면서 안정적인 삶을 누리게 되지만, 젬은 우스타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생기지 않는 아이에서 비롯하여 부자간의 비극적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 예술품, 유적에 대한 집착이 점점 심해진다. 한편 이 시기에 페르시아의 왕서에 나오는 쉬흐랍과 뤼스템 이야기를 알게 된다. 젬은 아이가 없는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쉬흐랍’이라는 건설회사를 세우고, 아내와 회사를 발전시키는데 매진하여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어릴적 우물파는 일을 하며 겪었던 우스타를 버리고 도망친 기억과 빨강머리 여인이 운명적으로 얽히면서 젬은 두개의 신화처럼 비극적인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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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대립되는 관계이다. 부자 관계 이전에 한 집단 내 권위를 가진 인간과, 그것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간 사이의 역학관계라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하면서부터 있었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터부시 되는 이야기이다.

현실에서 이 이야기는 단지 신화적 이야기 일뿐, 문명화, 사회화된 인류에게, 현대 가족 사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초적인 이야기에 집중하기 보다 그 상징과 의미를 본다면 오늘날에도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남자 아이는 태어나서 마주한 아버지라는 거대한 존재에 맞서며 성장하게 된다. 특히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이 인생의 큰 줄기를 결정한다는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 영향은 아버지의 존재부터 시작해 그의 성격, 직업, 취미 가족에 대한 애착과 같은 다양한 것일 수도 있고, ‘부재’ 자체 일 수도 있다. 후자의 영향을 받은 나로서는 가끔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궁금할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이 주는 울림이 조금은 더 묵직하게 느껴졌고, 주인공 젬의 비극에 조금 더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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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주인공 젬은 운명을 벗어나고자 했던 오이디푸스 처럼, 2부에서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뤼스템 처럼 보이지만, 이 두 이야기는 명백하게 다른 이야기이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쉬흐랍은 아버지에게 죽임당한다. 하나는 부친 살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 살해 이야기이다. 하지만 두 이야기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살짝 틀어 이어붙인 것처럼, 한 인간의 삶을 관통하도록 풀어낸 점이 흥미로웠다.




p.130. 모든 사람들처럼 평범한 ‘보통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나도 오이디푸스가 취했던 행동과 정반대,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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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5. 우리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말해 주기를 바란다. 왜 그럴까?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와 관련해 무엇이 도덕적이며 옳고 무엇이 죄악이며 그르다는 결정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확인해야 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항상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머릿속이 혼란스럽거나 우리 세계가 허물어졌을 때, 우리 영혼이 번민에 찼을 때만 아버지를 원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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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6. “당신에게는 신이 주신 태생적인 운명이었던 것이 내게는 의도적인 선택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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