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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Jul 28. 2019

(책리뷰)레가토 - 권여선


권여선 작가를 검색하면 최신작 레몬에 대한 이야기 투성이다. 그걸 보고 또 청개구리 심보가 도져서 인지 나는 다른 장편소설이 보고 싶어 졌다. 찾아보니 2012년, 멀지 않은 과거에 나온 장편 제목이 눈에 띄어 바로 집어 들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모르고 책을 열었다. 그다음부터는 그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때는 유신 시대, 서울의 한 대학교 운동권 모임 '전통 연구회' 멤버들은 박인하를 리더로 똘똘 뭉친 강경 운동권 조직이었다. 독재에 맞서는 운동권 조직이었지만 그들은 20대 초반에 불과한 나약한 청춘들이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은 명확히 풀리지 못한 채로 삼십 년이 넘는 세월에 각자의 삶을 흘려보냈다. 50대가 된 그들 앞에 나타난 한 젊은 여자로 인해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며 이야기는 풀려간다.


그저 이야기로만 들었던 시대가 머릿속에 생경하게 그려지는 이유는 마치 살아있는 인물들의 맛깔난 대화에 있는 것 같다. 당시 운동권들이 썼던 은어들과 사투리 발음 그대로 쓰인 대화들이 오히려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캐릭터를 확실하게 채색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플롯 구성임에도 인물들의 캐릭터가 확고하게 잡혀있어 어색함이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관념적인 서사보다는 이야기, 스토리텔링에 힘을 준 작품은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역시 이야기가 주는 속도감은 독자를 몰입하게 만든다는 것, 그 이야기에 휩쓸려 있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의 즐거움은 소설을 읽는 큰 기쁨 중 하나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다양한 인물들과 한국 근현대사 사건들에 녹여내다 보니 다소 극적인 부분이 없지 않지만 사투리 그대로 쓰인 찰진 대사들과 활어처럼 살아있는 것 같은 진태, 유보살, 권보살 같은 캐릭터들은 도저히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한국어를 알고 있는 한국인만이 이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영어나 스페인어, 불어로도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궁금하다. 한국어로 쓰인 문장은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행복했던 것이든, 불행했던 것이든, 삶에서 그때의 시간은 오로지 단 한 번만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에 후회를 남긴다. 10대의 어리석음과 나약함, 20대의 소심함과 옹졸함은 30대인 지금의 내가 느끼는 후회이다. 그때는 왜 그렇게 날 선 감정과 행동을 했을까, 그때의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의 나는 몰랐던 감정들과 행동에 대한 이유는 시간이 지난 미래의 내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40대, 50대 그 이후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후회를 느끼게 될는지 궁금하다. 


각자의 생은 멀리서 뒤돌아보면 레가토처럼 이어져 보이는 것일까. 기차를 타고 뒤를 돌아보면 길이 굽어있는데 타고 갈 때는 직진인 것처럼 보이듯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뒤돌아보면 후회로 가득 찬 것이 우리 인생인 것이다. 노년의 얼굴에 패이는 주름과 굽는 허리는 그 후회에 대한 무게인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의 나는 한켠에 품어 가고 싶다. 그것만이 지난한 현재를 달래는 안줏거리이며 다가올 불투명한 미래에서 꺼내먹을 수 있는 간식 주머니 같은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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