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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Oct 27. 2019

(책리뷰)이방인 - 알베르 카뮈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 기묘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짧은 소설은 카뮈를 불멸로 만들었다.


'이방인'은 실존주의 대표 문학으로 불리지만 실제로 카뮈는 그 방향 자체가 달랐다. 실존주의 대표자인 사르트르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했던 것과 달리 카뮈는 사회에서 한 발짝 떨어짐으로써 개인이 마주하는 사회 ‘부조리에 대한 이해’를 시도했다. 둘은 사형 제도에 대해서도 상반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활동 시기가 같았을 뿐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생이란 ‘의미 없음’이며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법, 제도, 사회가 개인의 욕구와 맞물려 또 다른 부조리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 부조리함을 인식하면서부터 존재의 이유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삶과 평행을 이루는 죽음, 모든 인간이 마주하는 죽음을 인식하면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뫼르소의 살인으로 구성된 1부는 그가 어떤 것에도 의미를 찾지 못함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죽음, 친구와 상사의 위로, 애인 마리와의 사랑, 파리로의 진급 그 어떤 것에서도, 실질적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눈부신 태양 때문에 사람을 쏜 뫼르소는 법정에서도 무의미의 삶을 고수한다. 배심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른 어법’을 요청하는 변호사에게 ‘그럴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뫼르소의 재판에서 진실과 거짓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죽음과 전혀 무관한 검사와 배심원들, 즉 전혀 상관없는 이들은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 직면한 상황에서 순수하게 면회의 기쁨을 느끼고 감방 생활에 적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아들인다.


죽음의 기쁨,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곧 죽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느낀 뫼르소는 아주 오랜만에 죽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왜 한 생애가 끝 나갈 때서야, 그 생명들이 희미하게 꺼져가는 장소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마음이 내켰을까. 사형을 기다리면서,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야 의미를 찾지 못했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해한다. 

사형 집행일을 기다리던 뫼르소와 사제의 마지막 대화는 카뮈의 세계관,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정수이며 사회 부조리에 직면한 모든 인간에게 던지는 반항의 메시지이다.




책을 덮은 후에 몇 번을 다시 돌아가 읽게 하는 이 문단은 죽음에 대한 관조적 태도, 필멸의 속성을 가진 모든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만든다. 사실 이 작품을 다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과거에도 그랬고, 역시 지금도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 것인가. 뫼르소처럼, 미하엘 콜하스처럼, 또 다른 어떤 신념을 위해 죽어간 이들처럼,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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