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 모든 순간

폴킴 (2018.03.20)

by 안개홍

네가 없이 웃을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

힘든 시간 날 지켜준 사람. 이제는 내가 그댈 지킬 테니

너의 품은 항상 따뜻했어. 고단했던 나의 하루에 유일한 휴식처

나는 너 하나로 충분해. 긴 말 안 해도 눈빛으로 다 아니깐

한 송이의 꽃이 피고 지는. 모든 날, 모든 순간 함께해.


오전 7시 30분. 장마철 습습한 바람이 창문 너머로 스며들었다. 개운치 못한 아침. 어김없이 화장실에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묻혔다. 거울 앞에 팔자주름이 지난해보다 깊어진 내 얼굴을 보며 그 안에서 아름다움의 외적 증거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해봤다. 특별함이 없는 무지의 삶, 내 모습.


서서히 나는 늙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우울했다. 두터운 뱃살에 지루함과 게으름을 가득히 실은 채 마치 덕망처럼 붙들어 매고 살고 있었다. 매일 똑같은 회사와 집을 오고 가며 속절없이 사라지는 총각의 흔적들을 아쉬워했다. 눈부셨던 과거가 그리웠고 현재보다 더 커 보였다. 철없이 결혼을 너무 일찍 한 것은 아닌가 생각도 했다. 과거에 대한 미련과 의욕이 없던 현재를 보내던 날의 연속이었다.


2018년에는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버거운 육아에 지친 우리 부부는 자주 싸웠다. 종일 세탁기에 돌아가는 아이들 빨랫감, 아이들 젖병 세척, 옷을 입히는 것 등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다툼이 시작되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우리 부부간 대화는 단절되었다. 불편한 감정을 회복하고자 아내가 내게 말을 걸 때에도 난 그 자리를 회피했다. 그냥 모든 게 귀찮고 버겁고 힘들어서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싸운 뒤 아내는 한숨을 깊게 내쉬곤 조용히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애들은 나만 키우니?"


또다시 집안일을 가지고 싸웠던 어느 날, 기어코 또 모진 말들을 해서 아내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본심은 그게 아닌데, 그냥 사소한 모든 것들이 귀찮고 짜증 나고 화가 났다. 육아에 찌들어 나를 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냥 싫었다. 아내와 감정싸움에서 승부욕과 자존심을 내세우며 매몰차게 몰아부쳤다. 지루한 일상과 볼품없는 내 모습 속에서 켜켜이 쌓아둔 모든 불만을 그녀의 탓으로 돌렸다.


연거푸 모진 말들이 내 입에서 배설될 때도 아내는 그저 말없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대꾸 없는 아내를 확인하고 철없는 정신승리를 확인한 채 나는 소파에 털썩 누웠다. 적막해진 거실이 싫어 티비를 켰다. <키스 먼저 할까요?> 드라마를 방영 중이었다. 챙겨보지 않는 드라마였지만 채널을 돌리기가 귀찮아 그래도 두었더니 티비 너머로 뜻밖의 노래가 들려왔다. 폴킴의 '모든 날, 모든 순간'. 겨우 가사 한 구절이 끝났을 뿐인데, 아내는 그 노래를 들으며 숨죽여 울었다.


그 가사들이 송두리째 내 마음을 흔들어댔다.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이내 가슴이 시리도록 차가워진 감정이 뜨겁게 아내에게 화를 냈던 그 감정에게 연신 귀싸대기를 날려대며 내게 말했다.


“너는 그녀에게 뭘 해줬길래 그렇게 바라니?”

“지금까지 넌 그녀를 위해 뭘 했는데?”

“왜 너는 항상 그렇게 너만 생각해?”


함께 맞은 세월에 그녀가 나도 모르게 느낀 서러움들. 동년배 친구들이 힘껏 누리고 있을 아가씨의 권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생생하게 풍기던 그 비릿한 싱그러움. 그녀의 모든 걸 빼앗아간 대상은 오롯이 나였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그녀의 현실. 나에게 늘 한결같았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아내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들도록 했다.


아내는 내게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내가 힘들어할 때 기대었던 사람.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보듬어주던 여자. 두 아들의 유일한 엄마였다. 단 한 번도 아내가 소중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졌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그토록 내가 원했던 그녀에게 난 왜 이렇게 모질었던 것인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 아이를 씻기고 재우고 11시 넘어서 그저 드라마를 보는 낙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그 소소함과 평범한 나날 속에서 난 도대체 무엇을 했던 걸까? 왜 그렇게 끝가지 자존심을 내세웠던 걸까?


힘들 때는 나부터 편하자고 아빠의 삶으로 애써 변명했다. 그녀는 엄마의 삶으로써 더욱 힘들었을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그렇게 미움받을 말들을 내뱉고 말았다. 더 이상 특별함도 없이 색 바랜 갱지처럼 써도 되고 안 써도 그만인 것처럼 하루를 대했다. 결혼 전, 아내에게 제안했던 미래의 모습은 현재에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회사일이 바쁘다며 근사한 밥 한 끼를 제대로 사준 적이 없었고 돈을 아낀다며 생일에는 그 좋아하는 꽃다발은커녕 꽃 한 송이도 선물해주지 못했다. 난 철저하게 아내를 방치했다.


당장, 지금 사과하고 싶었다. 흐느끼는 아내의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가슴이 더욱 미어졌다. 지금 이 순간,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어떤 말로 그녀를 위로할 수 있을까. 연애시절, 선이 팽팽하게 살아있던 아름다운 낱말들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 달콤한 단어들이 어렴풋이 기억은 났지만 스스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기적인 마음이 끝까지 사과의 필요성을 보류시켰다.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한동안 그 새벽에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밤거리를 거닐며 자성하는 마음으로 가사를 외웠다. 무수한 별들처럼 후회스러웠던 날들을 반성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인 채로 한치의 고민 없이 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네가 없이 웃을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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