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2017.03.24)
난 파도가 머물던 모래 위에 적힌 글씨처럼
그대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늘 그리워 그리워
여기 내 마음속에 모든 말을 다 꺼내어 줄 순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 직장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난 아침 출근길마다 마주치는 표정 없는 직장인의 삶을 살았다. 그 일상이 힘들고 지루 할 때는 때때로 추억이 주는 기쁨을 먹으며 버텼다. 버티다가 버티다가 기억이 희미해져 더 이상 생각나지 않을 때는 그 날을 함께 공유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그 날은 삶에 찌든 직장인에서 다시 철부지 중학생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야, 그때 너 축구하다가 교복 바지 터졌잖아. 크큭, 그게 가장 기억에 남아."
처음 모였던 우리는 함께했던 즐거운 에피소드를 하나둘씩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마치 길가에서 5만 원짜리 지폐를 주운 청소년처럼 설레어했고 행복해했다. 두어 번 같은 모임을 이어간 후로는 결국 대화의 소재가 고갈되었다. 그 뒤로는 멈춰진 시간 속에 조연으로 지냈던 주변 지인들까지 열심히 쥐어짜서 현재로 소환했다. 결국 우리 입에는 근황조차 몰랐던 이들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걔는 지금 뭐한데?"
"응. 대기업 입사했다는데? 잘 나가나 봐."
"그래? 그렇게 잘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어느 새부터 우리는 온전히 우리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대신 우리의 직업, 우리의 차, 우리의 벌이, 우리의 직장, 우리의 집 평수 따위에 집착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철저히 세뇌시킨 비교와 경쟁이 우리를 지배했다. 성공한 어른의 사회적 징표라는 잣대로 친구들을 제멋대로 평가했다. 그 모임이 지속될수록 몇몇은 우월감을 느꼈으며 몇몇은 더 이상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의 사진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 느낌.
서른이 넘은 뒤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우연히 결혼식장에서 마주하는 날에는 안부인사로 '잘 지냈니?' 보다 '뭐하고 지내?'를 물었다. 그렇게 먼저 말을 건네었던 이들은 '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다음 대답을 준비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은연중에 나도 그의 직업이 궁금했었고 그의 차가 궁금했었다는 사실. 나보다 그가 특별히 뛰어나지 않았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는 사실. 혹여나 그 친구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비교우위에서 승리했다고 우쭐했다는 사실. 그것밖에 안 되는 자의식이 너무 부끄러웠다.
본질의 부재한 느낌은 너무 슬펐다. 화려한 파티가 끝난 뒤 몰려오는 공허함처럼 내 마음을 헛헛하게 했다. 모임에 남은 것은 지극히 타의적인 의무감과 상투적인 안부인사뿐. 될 때까지 된 척하는 친구들만 남은 채로 만남이 이어져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난 문득 이런 관계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변화무쌍한 인생 속에서 한결같았던 우리의 빛나는 시절이 힘없이 사라져 갔다.
난 궁금했다. 왜 이래야만 하는 것인가? 이윽고 문제가 '허기진 공감 상태'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관계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하고 많은 추억을 나눴던 사람일지라도 그 둘이 현저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허기진 공감 상태'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 다른 환경에서 다른 직업으로 다른 시간을 보내게 되면 더 이상 우리는 서로를 공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것이 가능했다. 우리는 같은 중학생이었고 고등학생이었으며 대학생으로 주어진 최대한의 시간을 함께 공유하며 살아왔으니까.
더욱이 다른 환경 속에서 서로 간 비교우위가 정해지기 시작하면 관계는 최악으로 끝을 맺었다. 경험 상,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는 쪽은 흔히 우리가 '잘 나간다고 말하는 친구' 쪽일 가능성이 컸다. 그 친구는 여기저기 떠벌려야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처럼 행동했다. 친구를 온전히 감정과 추억을 공유한 대상으로 보지 않고 관계의 우위에 비교 대상으로 평가했다. 가장 최악인 경우는 그 성공한 친구가 공평하게 공유했던 '추억 공간' 까지도 우위를 따지려 들 때였다.
모임에 나왔던 친구 K와 P는 학창 시절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자본주의가 조성한 삶의 기준이 그들의 우정을 갈라놓았다. K는 본인 성공의 자축을 위해 P의 과거까지 깔아뭉갰다. 현재 P가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으로 그의 과거를 탓해버렸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역겨웠다.
결과적으로 그 모임의 끝은 좋지 않았다. 서로 간 감정의 상처를 지닌 채로 끝을 맺었다. 별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민감하게 뉘앙스를 신경 쓸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애써 10년 동안 모아둔 값진 추억을 단 1년 사이에 증발시켜버렸다. 서로가 있는 그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은 차와 집, 돈과 명예, 직업과 직장에 집중했다.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그 쌉쌀하고 아린 맛이 강해질 때마다 난 아이유의 <밤 편지>가 떠오른다. 어른이 되고 포장지와 같은 삶에 지칠 무렵에는 항상 이 노래를 반복해서들었다. 그 때마다 가혹한 현실로 인해 마음을 먹먹하게 했던 그 추억들이 사라질까 봐 한없이 두려웠다. 그렇기에 아직 곁에 있어도 항상 그리웠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이 친구들의 마음의 창 가까이에 다가가면. 모든 걸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집중하며 사랑하길 바랬다. 눈을 감고 추억 한편, 가장 먼 곳으로 함께 가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