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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Aug 29. 2023

그날 밤, 정말 마신 게 하나도 없는데

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아이돌에 큰 흥미를 느끼는 타입은 아닙니다. 사춘기부터 밴드 음악이나 인디 음악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이돌이라고 하면 샤이니, 에프엑스 정도를 들어봤죠. 누가 어느 소속사인지도 잘 몰랐으니까요. 그러다 우연히 찾은 몇 개의 영상이 절 바꿨습니다. 노래 영상은 아니었을 거예요. 아홉 명의 소녀가 실시간 동영상 라이브를 통해 웃고 떠드는 영상이었어요. 너희들은 참 밝구나. 세상이 즐겁니? 아마 이렇게 독백했을 겁니다. 부럽고 질투 나는 기분으로 몇 개의 영상을 살펴보다가 노래를 들어봤어요. ‘우아하게’라는 그들의 데뷔곡입니다. 상큼하고 귀여운 멜로디를 탑재한 이 노래는 들을 만했어요. ‘우아하게’라는 제목은 ‘우! 아!’ 하며 놀라게 해달라는 의미와 ‘우아하게 대해달라’라는 중의적인 뜻으로 읽혔죠. 생각해보면 노래보다는 그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좋아 빠져들었습니다. 트와이스(Twice)입니다.


‘우아하게’ 앨범부터 ‘필 스페셜(Feel Special)’까지 출시된 모든 앨범을 구매했습니다. 그들의 팬클럽 커뮤니티와 갤러리를 방문해 여러 정보를 섭렵했고요. 팬들은 트와이스가 출연한 동영상을 추출해 구성원에게만 공개하고 있었는데, 전 그 영상을 모조리 모아 외장하드에 소장했어요. 그 외장하드는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저만의 공간이었어요. 살면서 다 처음 해보는 일들뿐이었죠. 잠실 인근에서 펼쳐졌던 첫 대형 공연 예매일에는 팬들과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아 예매 오픈만을 기다렸어요. 손이 빠른 편이 아닌데도 1층 중간 좌석을 확보했을 때의 짜릿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공연 당일만을 기다리며 노랫말과 멜로디, 응원법을 숙지했죠. 그러다 공연 전날 문득 ‘현타’가 왔습니다. 남자 혼자서 이게 무슨 짓일까. 누가 뭐라고 흉을 보진 않을까. 가만히 공연을 보는 편인데, 모두가 일어나 환호할 때 혼자서만 앉아 있게 되면 얼마나 쑥쓰러울까. 머릿속으로 온갖 훼방꾼들이 등장했고, 결국 그들에게 패배했습니다. 공연 전날 티켓을 취소하고 일부의 수수료를 지불했어요. 다음 날 커뮤니티를 통해 공연 실황을 접하는 제 마음은 쓰라리고 아팠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좋아한 것은 트와이스의 노래라기보다는 ‘함께 행복하다’는 기운이었습니다. 아홉 명이 함께 활동하는 끈끈한 모습은 동경의 대상이었으니. 다른 글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 ‘단체 활동과 끈끈한 우정’ 따위를 동경해온 제게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 덕질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다른 아이돌을 좋아해서가 아니에요. 돈을 벌어 먹고살아야 하는 직장인의 현생을 자각한 전 시간과 소비의 효율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몇 가지 문화생활과 취미를 줄여나갔어요. 대표적인 게 트와이스 덕질입니다.


아이돌을 애당초 좋아한 적 없으니 딱히 그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었어요. 트와이스는 그새 글로벌 걸그룹으로 성장해 일본과 미국, 유럽 등지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전 여전히 제자리였어요. 변함없이 회사의 돈을 받기 위해 누군가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수긍하고 억지로 크게 웃었습니다. 진심으로 웃어본 게 언제였던가, 떠올릴 즈음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절 트와이스의 노래로 안내했습니다. ‘알콜 프리(Alcohol free)’라는 곡입니다.


너와 있을 땐 내게/신기한 변화가 있는데/자꾸 미소 짓게 돼/아무 일도 없는데/자꾸 마법에 걸려/밤을 새워도 안 졸려/다른 생각 지워져/심장 소리는 커져/사랑이 참 쉬워져/그래서 빠지고 빠져 점점 너에게/That's what you do to me/나는 Alcohol free 근데 취해/마신 게 하나도 없는데/너와 있을 때마다 이래/날 보는 네 눈빛 때문에/너는 눈으로 마시는 내 Champagne, 내 Wine/내 Tequila, margarita, Mojito with lime, Sweet mimosa, pina colada/I'm drunk in you


함춘호의 산뜻한 기타 연주와 박진영의 대중적인 작법이 돋보이는 이 곡을 듣자마자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랑에 빠진 20대 여인의 심정이 담긴 노랫말은 유치하기보다는 귀엽게 느껴졌죠. 안토니오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의 보사노바 음악을 좋아했던 제게 이 곡의 템포는 더없이 잘 맞았어요. 마치 제 신체 사이즈를 재서 배달돼 온 옷과 마주한 기분이었달까요. 트와이스 멤버들의 매력이 골고루 살아난 이 곡을 듣고 있자니 그들이 실력이 일취월장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트와이스는 데뷔 초기부터 예쁘지만 노래 실력은 부족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던 그룹이죠. 더군다나 질투와 협잡이 난무하는 아이돌 판에서 이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요소였어요. 하지만 ‘알콜 프리’에서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더군요. 모두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곡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었으니까요. 전원이 메인 보컬 지효처럼 훌륭하게 노래 부를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one이 아니라 only가 아니던가요. 최고가 될 수는 없더라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이 될 수는 있는 거니까요. 게다가 전 그 ‘최고’의 기준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누구처럼 불러야 최고인가요?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2등 가수가 되는 것일까요. 가창 테크닉보다는 곡 분위기를 잘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그러니까 저는 어제 퇴근길 내내 ‘알콜 프리’에 빠져들었다는 말입니다.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뮤직비디오와 공연 영상을 찾았어요. 다른 가수들의 커버 노래(정세운, 김세정 등)와 세계 팬들의 커버 댄스도 찾았고요. 심지어 뮤직비디오 리액션 콘텐츠까지 챙겨봤죠. 노래와 사랑에 빠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온 마음으로 느낀 밤이 있었습니다. “신기한 변화” 속에서 저는 “다른 생각”은 지운 채 이따금 “미소”를 지었어요. 그날 밤 “마신 게 하나도 없는데” 저는 마치 취한 것처럼 흐느적댔습니다. 마치 그들과 함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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