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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Sep 01. 2023

하얗게 타버린 또 하루,  그 밤 달빛

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어린 시절 제가 살던 서울 성북구 종암동은 서울 변두리이자 낙후된 공간의 상징이었습니다. 국회의원 후보들이 선거 때마다 “낙후된 이 지역을 발전시키겠다”고 돌림노래처럼 외치고 다녔던 동네지요. 초등학교 수업이 끝나면 가벼운 발걸음으로 잽싸게 달려갔어요. 국민은행 건물과 육교를 지나 종암시장으로 들어가면 한편으로는 건어물과 야채, 과일을 파는 상인들이 보이고, 다른 한편에는 동시상영관 금강극장이 보였습니다. 시장 쪽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면 1층에는 비디오 가게와 구멍가게(마트)가 있는 4층짜리 건물이 있었어요. 그곳 3층에 제가 살던 집이 있었죠.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도봉구 쌍문동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종암동은 제가 아는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부모님이 항상 늦게 들어오던 때 학교에서 돌아온 전 거실 마룻바닥에 누워 검정색 고물 라디오를 껴안고 살았어요. 주파수 숫자가 지워져 감각으로 돌려 좋아하거나 흥미로운 노래가 들리면 멈춰놓고 한참을 들었죠. 데뷔하자마자 천재라 불렸던 김현철, 새바람이 오는 그늘, 조규찬, 낯선 사람들, 조동익, 여행스케치, 듀스, 스매싱 펌킨스, 너바나, 머라이어 캐리, 보이즈 투 맨 등 무수한 음악인들과 만났습니다. 공테이프는 필수여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빨간색 녹음 버튼을 눌렀죠. 그렇게 한 개 카세트테이프에 노래들이 모이면 ‘내 영혼이 흐르는 베스트 뮤직’ 같은 유치한 제목을 붙여 책상에 꽂아두었어요. 언제고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선물해야지 생각했지만 제게 그런 일 따위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내향적이고 말수가 적었던 저는 연애는 물론 여자애도 잘 몰랐거든요. 

 

어떤날의 음악을 그때 들었던가요.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설령 들었다 하더라도 인상 깊진 않았나 봐요. 그들의 음악은 어린 제가 듣기엔 ‘너무 어른의 음악’ 같았으니까요. 어떤날은 한국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 조동진의 동생인 베이시스트 조동익과 기타리스트 이병우로 구성된 그룹입니다. 그룹명은 조동진의 2집 수록곡으로 허영자 시인의 시에 조동진이 곡을 붙인 ‘어떤날’에서 따온 것이라 해요. 1984년 결성돼 1986년 1집을 발매하고 3년 뒤 1989년에 2집을 발표한 뒤 활동을 중단했다고 하죠. TV 출연을 한 것도 아니고 큰 반향을 일으킨 것도 아니지만 ‘아는 사람들은 아는 음악인’으로 통했다고 하네요. 

 

어떤날의 음악에 꽂힌 건 사회생활을 하면서예요. 자정까지 야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 있노라면 정말이지 시간이 멈추길 바랐어요. 세상 모두가 싫었고, 아무도 저를 건드리지 않길 바랐습니다. 누구든 건드리면 바로 폭발할 준비가 돼 있었거든요. 사람이 이러다가 자살하는 건가 싶을 때면 절 위로해주던 것은 달이었습니다. 차창 너머에서 절 따라오던 하얀 달. 둥근 달이든, 반달이든, 초생달이든. 실은 무엇이든 달이면 좋았습니다. 그러니 아무 말 없이  따라오는 달을 보며 혼잣말로 이런저런 말을 했겠죠. 

 

오늘은 팀장이 또 ‘꼬장’을 부렸어. 왜 고작 그런 일로 야근해야 하지? 주말에도 일하는데 왜 나는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이하의 월급을 받는 거냐고. 하소연이 9할이지만 가끔은 이상한 이야기도 꺼냈습니다. 소설가가 꿈이었던 저는 가끔 말 안 되는 플롯을 즉흥적으로 지어내 달에게 이야기 들려주고는 했어요. 전 형편없는 이야기꾼이었으나 달은 언제나 변함없는 표정으로 제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든, 편견 없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달뿐이라는 것을. 

 

커다란 빌딩 사이로/오늘도 어제처럼/어설프게 걸린 하얀 초생달/이맘때쯤이면 별로 한 일도 없이/내 몸과 마음은 왜 이렇게/지쳐오는걸까 (중략) 뜻 모를 너의 얘기와/버려진 하얀 달빛과/하얗게 타버린 또 하루를/난 위로하면서 술 취한 내 두 다리가 서성거리는 까만 밤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 택시 안에서 ‘초생달’을 들었을 때 제 몸은 굳어버렸습니다. 당시 초생달이 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초생달을 떠올리고 있지 않았을까요. 앉는 것도 힘들었던지 기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던 그때, 버려진 달빛 아래에서 하얗게 타버린 하루를 떠올리던 제가 그 새벽 택시 안에 있었습니다. 택시에 내렸지만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워 캔맥주를 사서 마시고는 노랫말에서 말하듯 부러 술 취한 두 다리로 서성거리던 까만 밤이 있었어요. 누가 봐도 제 스스로 연출한 그 밤 풍경에서 저는 마치 주인공 같았습니다. 비련의 주인공까지는 아니겠으나, 하루를 고되게 보낸 성실한 직장인의 모습 같았달까요. 쑥스러운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달이 그렇게 푸근하게 저를 내려다봤습니다.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어디서든 항상 조연이나 엑스트라 같았던 저도 그때만큼은 주인공이 될 수 있었죠. 그러고 나면 비로소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저는 몇십 미터 앞의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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