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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Oct 25. 2023

쓸데없는 일들은 쓸모가 있어요

매일 쓰는 편지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었어. 각자 가정과 사정이 있는 친구를 만나기 쉽지 않은 데다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더 어려워. 40대가 된 후로는 소셜 모임에 가입하는 것도 주저하게 돼. 누구도 말리지는 않지만 20~30대 위주로 구성된 프로그램과 실제 20~30대의 후기를 보고 있으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어이, 꼰대! 늙은이! 여긴 아저씨가 낄 데가 아니에요.” 소셜 모임 프로그램을 살펴보는 게 취미인데 한 번도 참여한 적은 없어. 그냥 보고서 상상만 해. ‘내가 만약 모임에 가입했다면 이런 공부를 하고, 토론을 하고, 모임이 끝나면 같이 모여서 술도 마셨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은 참 재미있고 신나지. 그러고 나서 ‘현타’가 오기는 하지만 말이야.

 

집 밖에서 내가 환영받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경우는 오직 돈을 쓸 때뿐이야. 단골 카페에 가서 커피와 원두를 사고, 마트에서 생필품을 사고, 헤어샵에 가서 비싼 펌 시술을 받을 때면 그곳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날 반겨줘. 돈을 쓰지 않으면 누구도 내게 관심이 없지. 하지만 이것도 돈이 많을 때가 지속성이 있는 거야. 나 같은 월급쟁이는 월급날 이후 며칠 정도만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어.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기나긴 춘궁기가 시작되는 거야. 그럼 뭘 하느냐고? 집에서 혼자 놀아야지. 원두 갈아서 필터로 커피 내려 마시고, 수동 에스프레소 기계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서 우유나 기타 재료를 넣어 라떼 베이스 음료(카푸치노, 흑임자 라떼 등)를 만들기도 하지. 만들어놓은 음료의 양이 많아도 어쩔 수 없이 혼자 다 마셔야 돼. 온갖 잡생각을 하는 것도 좋아.

 

그래도 제일 재미있는 것은 역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멍때린다’고 하지. 노트북으로 음악을 틀어놓는 게 기본 세팅이야. 보통 유튜브 뮤직의 플레이 리스트를 이용해. 난 올드 재즈,기타 한 대를 반주 삼아 부르는 20세기 초중반의 블루스, 히사이시 조나 미셸 르그랑의 영화음악을 좋아하더라고. 여러 음악을 듣다 보면 유난히 반복 버튼을 자주 누르는 음악들이 있거든. 그렇게 플리를 틀어놓고 거실 소파에 누워.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어. 대개 소설과 에세이, 인문서야. 길게 보지는 못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는 잘 읽히는데 집에서 편히 쉴 때는 집중이 안 되더라. 몇십 페이지 읽다가 손을 놓겠지. 그러면 어느내 내 두 손은 스마트폰으로 향해. 유튜브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찾을 때도 있고, 아니면 네이버나 구글로 뭔가를 막 검색할 때도 있어. 이를테면 하루키 책과 잘 어울리는 음악, 미스터리 소설이나 공포 소설을 잘 쓰는 법, 나처럼 마르그리트 뒤라스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지. 근데 다들 나보다 활동적이고 잘 살고 있던데? 대개 애인도 있더라고. 하긴,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자신의 일상을 몇십 장의 사진으로 소개하는 사람 대부분은 자랑할 게 많은 사람 같더라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랑할 만한 삶’이라 보이고 싶을 수도 있고.

 

요즘 정말 좋은 건 쓸데없는 일들을 하는 시간이야. 돈도 안 되고, 딱히 교훈이나 지식을 얻지도 않는 시간 말이야. 부모님이 이걸 본다면 내 등짝을 때릴지도 몰라. 나이도 찰 만큼 찬 녀석이 이게 뭔 짓이니? 나가서 여자라도 만나! 아무 소용도 없고, 얻는 것도 없는 시간은 내게 위협적으로 달려들지 않아서 좋아.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봐. 아! 출근해야 하지? 출근해봐. 업무 봐야지? 점심시간이 돼봐. 오후 업무 전까지 알차게 놀아야지? 퇴근 시간이 돼봐. 바글거리는 전동차와 버스를 뚫고 가야지. 넌 아침부터 저녁에 다시 집에 돌아오기까지 절대 마음 편히 쉴 수 없어. 뭔가를 계속 생각하고, 무언가와 부딪쳐야 해. 그러니까 자기 전에 즐기는 ‘쓸데없는 시간’이 얼마나 좋겠어? 쓸데없는 시간이 사르륵 쌓이면 꼭 방패 같잖아. 날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방패. 걱정 안 해도 돼. 걔네는 사라지지 않아. 네가 불안하고 흔들릴 때마다 널 꼭 껴안고 지켜줄 거야. 걔네 덕에 흔들리더라도 아주 넘어지지는 않아.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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