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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Oct 23. 2023

생긴 게 다는 아니잖아

매일 쓰는 편지 

영화 <범죄와의 전쟁>은 <타짜>만큼이나 명대사를 많이 양산해낸 히트작이야. 다들 자신만의 명대사가 있을 텐데 내 경우에는 유난히 잊히지 않는 대사가 있어. 주인공 최익현이 최주동 검사에게 로비하며 금두꺼비를 건네자 옆에 있던 집안 어르신이 이렇게 말해. “고놈 그거 은혜 잘 갚게 생겼다.” 상황과 상황, 스토리텔링을 잇는 대사일 뿐, 큰 의미는 없을지 모르지만 난 이게 유난히 잊히지 않더라고. 사람들은 얼굴이나 외양을 보고 쉽게 그 사람이 누군지 판단하거든. 착하게 생겼네, 주먹 좀 쓸 것 같은데? 공부 참 못하게 생겼다. 

 

중학교 1~2학년 모두 같은 반이었던 k는 큰 키에 움직임이 느렸고, 말수가 참 적은 녀석이었어. 튀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어서 그리 눈에 띄지 않았지. 왜 그런 스타일 있잖아?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하는 데도 성적은 시원찮은 녀석 말이야. k가 그랬던 것 같아. 나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k보다는 조금 더 성적이 좋았고. 녀석은 워낙 순해서 보고만 있어도 참 좋았고, 친해지고 싶었지만 난 그러지 못했어.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던 나와 달리 녀석은 맨 뒤에 앉았던 데다 그 주변의 장신들과 친하게 지냈거든. 노는 부류가 다르다 보니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 같아. 

 

그 녀석의 존재감을 느꼈던 것은 1학년 가을 어느 무렵이야. 보름 전쯤 학교 인근 고궁에서 백일장을 했던 것 같은데 그날 수상자를 발표했어. 그런데 글쎄, k가 산문 부분 장원이 된 거야. 모두 놀랐을까? 난 정말 놀랐어. 사실 난 녀석을 깔보고 있었나 봐. 무척 얌전하고 순했지만, 반에서 중하위권 성적이어서 그렇게 생각했나 봐. 한편으로는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궁금했어. 도대체 어떻게 쓴 거야? 그때만 해도 내게 백일장은 그냥 보내는 시간이었거든. 그러니까 녀석은 남들이 다 놀거나 다른 생각을 할 때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는 거지. 학기가 끝나면 발행되는 문집에 그 녀석의 작품이 실릴 테지만 난 참지 못하고 녀석을 찾아가 물어봤어. 두영아, 너 백일장에서 무슨 글을 썼니? 나? 아버지에 대해 썼는데. 아버지? 응. 녀석은 쑥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나를 지나갔어. 그제야 나는 백일장의 주제가 ‘고궁’이었다는 게 떠올랐어. 고궁과 아버지를 연결했다는 거지? 학기가 끝나고 나서야 문집이 나왔고 나는 제일 먼저 녀석의 작품을 찾아봤어. 나는 고궁의 풀밭에 누워 잡생각을 하는 동안, 녀석은 고궁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 거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귀한 가치를 간직한 고궁처럼, 자신의 아버지도 그런 고궁 같은 분이라는 글이었어. 

 

이 녀석은 글을 잘 쓰는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당시만 해도 나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문장과 문단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k는 문장이 단정할 뿐 아니라 발상도 신선했어.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지. 고궁처럼 무르익어 가는 아버지라니. 그런 식으로 효도를 하다니. 아버님께 사랑 좀 받겠는데? 솔직히 질투심이 났어. 그리고 내가 원망스러웠지. 도대체 나란 놈은 뭘 하는 녀석이란 말인가. 시간을 버리는 게 익숙한 그저 그런 꼬마일 뿐인 걸까. 질투심에 사로잡힌 나는 다음 날부터 학교 도서관을 찾아가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어. PC 통신 글쓰기 모임에 가입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나는 상반기 독서왕(최다 대출 회수 기록)이 됐고 하반기에는 백일장 산문 부문 장원에 올랐어. 그때부터였나 봐. 나도 잘할 수 있는 게 적어도 한 가지는 있다고 생각했지. 아직도 그 순간을 못 잊겠어.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내내 나는 산문 장원을 놓친 적이 없어. 고등학교 3학년은 참가하지 않으니 매해 상을 탄 셈이지. 월요일 전체 조회를 할 때 내 이름이 불렸지. 몇 학년 몇 반 XXX! 나는 떨리는 손을 감춘 채 단상에 올라 교장 선생님께 상을 받았지. 내게 글 잘 쓸 것 같다고 말해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글 잘 쓸 것 같은 외모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키 작고 뚱뚱한 데다 둔하고 말도 잘하지 못하는 나는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사춘기 꼬마였어. 누구도 내게 기대하지 않았지. 다만 내가 원했을 뿐이야. k보다 잘하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1년이 지나고 나서는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게 너무 좋았거든. 칭찬받는 게 좋아서 계속 쓰고 읽고 생각했던 것 같아. 

 

사람은 정말 얼굴만 봐서는 진가를 알 수 없는 것 같아. k가 그렇게 깊은 생각을 지닌 글쟁이일 줄 누가 알았겠어?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범죄자들 얼굴을 봐도 그래. 다들 얼굴은 멀쩡하게 생겼더라. 살면서 죄 한 번 안 짓게 생긴 사람들이 누군가를 스토킹하고 살해하고 마약을 하더구나. 그러니 잊지 말아줘. 사람은 생긴 게 다가 아니야. 눈이 달렸으니 당연히 외모에 눈이 가겠지만, 거기에 현혹되지 말아줘. 외모 뒤에 숨겨진 수많은 매력과 장점들이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어서 자길 찾아달라고, 발견해달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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