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는 편지
내가 처음으로 편지를 나눈 상대는 고등학생 시절 펜팔 친구였어. 중학생 때처럼 대놓고 왕따를 당하진 않았지만 고등학생이 돼서도 여전히 의기소침하고 잘난 게 없던 내게 다가온 친구는 없었거든. 내가 다가갈 용기도 없었고. 친구를 만들어 싶어 PC 통신의 여러 모임에 가입했고, 글쓰기 모임에서 부산에 사는 동갑내기 여자아이를 알게 됐어. 이과 학생이었는데 책을 좋아하고 침착하면서도 성격이 밝아 보였던 그 아이와 나는 금세 친해졌지. 사는 곳이 멀어 볼 생각은 하지 못했어. 하지만 편지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그 아이는 시인이기도 한 국어 선생님이 좋다고 말했고, 나는 작가 지망생의 특기를 살려 시를 몇 편 써 보냈지. 한참이 지나 친구는 시집과 편지를 보내왔어. 글쎄, 내 시를 국어 선생님께 보여줬다는 거야. 이런 부족한 점이 있지만 저런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며 선물로 전해주라며 선생님이 건네준 시집 두 권을 보내준 거야. 두 권의 시집에는 그 선생님의 서명과 함께 열심히 정진하라는 식의 글귀가 적혀 있었고.
그 아이는 소설과 시를 사랑하는 나를 신기하게 여겼고, 나는 수학 문제를 풀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그 아이를 낯선 세계의 모험가로 생각했어. 대학 입시 준비는 고등학생 아이들에게는 누구나 힘들 테지.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며 입시 스트레스를 풀었는지도 모르겠어.
어두운 하늘 끝에 버려진 외로움에 익숙한 달을 따라/힘없이 흩어진 저 구름과 희미해진 별들의 차가운 노래/나는 홀로 갈 곳을 잃어 불안함에 흔들리는 날개로/그저 멀리 날고 싶은 생각/그 마음 하나로 이렇게 두려움 없이 날아 어디로
-옥수사진관의 노래 ‘야간 비행’ 중에서
야간자율학습이 10시에 끝나면 사립 독서실로 자리를 옮겨 새벽 2시까지 공부하는 척을 해야 했어. 그때가 선명하게 떠올라. 내 바로 옆에는 스파크나 플레이보이 같은 잡지를 끼고 살던 재수생 형이 있었고, 같은 줄 어딘가에는 조그마한 소리에도 참지 못하고 나를 노려보던 모범생이 있었어. 나는 교과서나 참고서를 펴놓고 글자나 도형들을 들여보다가 졸다가를 반복했고, 그러다가 이따금 부산 친구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는 했어.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면 밤하늘의 달은 유난히 밝게 빛났고, 난 속으로 웃으며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하여튼 부산 친구도 같은 달을 보며 집으로 걷고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두운 하늘을 두려움 없이 날고 싶어 하던 소년·소녀였으니까.
고등학교 3년 생활 내내 우린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어. 난 지방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고, 녀석은 부경대학교 수학교육과에 입학했어.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친구는 학교를 다니면서 다시 공부해 부산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어. 대학생이 돼서도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지. 성인이 돼서 술을 마셨던 이야기,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그 친구와 함께 나누었을 테지. 우린 편지를 통해 이미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그 안에는 고통과 지루함, 흔한 일상과 작은 희망이 모두 담겨 있었지. 그 친구는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결국 다니던 학교를 계속 다녔고, 나는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어. 친구는 내가 복무하던 부대에도 편지를 몇 통 보냈을 거야. 한 번은 내가 군 동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동봉해 보낸 적 있어. 웃기게도 그 이후로 친구와의 연락은 끊겼어. 군대에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해 피골이 상접했던 데다 시꺼먼 몰골이었으니 아마 보고 깜짝 놀랐을지도 모르겠네.
군에서 제대한 후에 몇 번 편지를 보낸 적이 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고, 그 이후 나도 대학 생활에 충실하면서 그 아이를 내 기억에서 지웠어. 동갑이니 그 아이는 지금 40대일 테지. 결혼해서 살고 있을까, 여전히 부산을 지키고 있을까, 본인이 원하는 수학 선생님이 됐을까,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선생님일까 아닐까. 본가에 그때 받았던 친구의 편지들을 모아두었어. 부질없는 짓이지만 그 편지들을 버리면 마치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내팽개치는 것 같아 두려워. 학교에서 마음 나누는 친구 하나 없던 내게 그 아이는 힘든 시간을 건너오게 해준 고마운 존재거든. 또한 그 아이 덕분에 나는 편지 쓰는 재미를 배우고 깨우쳤어.
“넌 날 기억하고 있니? 남편과 아이들은 잘 있니?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즐거운 인생을 보내고 있니? 네가 맘껏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좋겠어. 어두운 하늘을 두려움 없이 날아오를 수 있길,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며 행복하길.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두려움 없이 날아올라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