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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가 가장 어려울 때도 있어요

인사 (범진)

by 레몬트리


"사랑의 스튜디오를 기억하세요?"

요즘에 연애와 관련된 예능이 '나는 솔로'가 대표적이라면, 90년대에는 '사랑의 스튜디오'가 큰 인기였어요.

저는 그때 초중고 학생일 시절인데도 일요일 오전에 교회를 후다닥 다녀와서 점심을 먹으며, '사랑의 스튜디오'를 보는 게 큰 재미였어요. 선남선녀가 나와서 서로 호감을 표하고,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 여러 재주를 보여주는 것도 재미가 있었지만, 가장 큰 재미는 마지막에 모니터에 띄워진 사랑의 화살표가 누구에게로 향하는지 내가 예상한 게 맞는지, 아닌지와 가끔 인기 많은 주인공이 동시에 지목을 받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마치 제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두근두근하면서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의 작대기(화살표)가 서로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내가 보는 그는 다른 이를 바라보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고, 그렇게 사랑은 엇갈리고 알 수 없고, 그래서 누군가는 웃지만 누군가는 울 수밖에 없는, 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기적'이 아닐 수 없어요.


KakaoTalk_20250131_171851315.jpg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애태웠을 그 마음이 아련했지, 너의 마음도 나의 마음도




얼마 전에 어떤 분의 카톡 배경음악에 "인사"(범진)라는 곡을 접했어요.

그 곡이 특별했던 이유는 배경음악을 바꾸신 그분이 제게 아주 귀한 마음을 내어주셨는데, 또 저의 속도를 맞춰주시기 위해 무척 애를 쓰셨는데, 저는 결국 원하는 답을 드리지 못했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솔직한 저의 마음을 말씀드렸어요. "마음을 알지만, 좋은 분인걸 알지만, 그 마음을 온전히 받을 수 없어 죄송하다. 받는 사랑을 하는 것이 훨씬 행복하고 마음 편할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저 스스로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고, 그렇게 속이고 시작하는 만남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을 것 같다."는 담담하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어요. 저 역시 이런 마음을 전할 땐 누구보다 용기가 필요했구요.


"그래도 기다릴 수 있다. 괜찮다" 하였지만, 왜 저라고 모르겠어요.

지푸라기를 잡는 마음으로 마음 한 자락이라도 붙들고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저는 더더욱 제 감정에 솔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가장 쉽지만, 사랑을 시작하고, 오랫동안 지켜내는 것이 어렵지요.

그런데 제가 경험해 보니 사랑을 지켜내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마음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물론 제가 말한 이 어려운 것은 흔히 말하는 찔러보기나 썸은 해당이 안 될 수도 있어요)

마음이 진중하고, 진심이었을수록, 그 크기가 무겁고 큰 사랑이었을수록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순간이 분명 있더라고요.


내가 먼저 시작하고, 내가 더 많이 사랑했기에 나와 같지 않은 마음의 상대에게 원망을 할 수도 없고, 미워하고자 해 봐도 미워할 수 없고 그럴수록 마음만 애가 타는 - 진짜 사랑은 그래서 혼자 하는 사랑이 가장 아프고 어렵고, 힘들 길인 것 같아요.


더더욱 비극적인 건 내가 이 짝사랑의 아픔을 알아도, 결국 내가 그런 고백을 받으면, 상대의 아픔과 서운함을 안다고 해서 억지로 노력으로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것에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의 아픔을 알고,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만, 마음이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동병상련,

이런 마음을 모르는, 사랑을 받기만 해 본 사람은 어쩌면 거절할 때 상대의 마음을 잘 모르기에 거절도 쉽게 쉽게 할 수 있지만,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해 본 사람은 동병상련의 마음이기에 거절조차 쩔쩔매며, 그 마음에 상처가 없을 순 없지만 최대한 덜 아프길 바라며 단어하나, 표정하나도 진심을 담아 조심스럽게 전하게 되어요. "좋은 분이니 저보다 좋은 사람 꼭 만나실 거예요. 응원하겠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형식적인 영혼 없는 흔한 대사가 아닌, 진심으로 예의를 갖추어 전하는 미안함과 감사함의 감정을 담은 메시지일 거예요.


범진의 <인사>는 그런 마음을 사무치게 잘 녹여낸 곡이라, 이 노랠 들으며 다시 한번 그때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또 나의 아팠던 시간도 떠올랐어요.

범진+인사.jpg


'슬퍼하기엔 짧았던 나의 해는 저물어간다'라는 구절에서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했기에 남들이 보기엔 기간도 짧고, 마음도 작게 보일 수 있어서 대놓고 슬퍼하기도 어려운, 그래서 실연을 한 연인처럼 통곡을 할 수도 상대를 원망할 수도 없이 그 마음을 내려놓고 저물어하는 하루를 바라봐야 하는 마음.

그러고 나니, 나의 마음속 별은 빛 한번 내보지 못하고 져야 하는 슬픈 운명.

애절하고, 처연해서 마음이 울컥한데, 다음 구절은 기어코 눈물이 나게 합니다.

상대는 모를지언정 혼자 마음 앓이하며 그가 내게 남긴 아주 사소한 추억마저 이제는 바람 따라 흩어져 보내야 한다는, 잘 지내라는 인사.


진짜 사랑을 시작도 못해보고 상대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 스스로 지는 별, 스스로 지는 꽃이 되는 그 모습, 그 포기는 세상에서 아마 가장 힘겹고 아픈 포기였을 터.


확률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할 수 있는 확률은 생각보다 매우 낮아요.

그렇기에 그런 포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서로 함께 시작할 수 있는 사랑"은 너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죠.


하지만 비록 포기해야 하는 사랑을 하였어도, 아마 진정한 사랑을 했던 이는 오늘 하루는 가슴속 별을 차마 꺼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깜깜한 밤이었겠지만. 그런 밤이 지나고 어느 날 쏟아지는 유성우를 만들어내며 누구보다 환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충분히 가진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도 살면서 언제나 내가 원하는 이로부터 원하는 마음을 얻지 못하는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날이 있을 거예요. 사소하게는 어린이 때 좋아하는 아이와 짝꿍이 되지 못하는 것부터, 나이들어선 삶을 녹여 모든 걸 내어 줄 운명이라 생각했던 상대라 할지라도 뒷모습만 하염없이 봐야 하는 순간까지....


하지만, 우리는 마지막 가사처럼 "잘 지내" 인사를 하고 오늘 하루를 떠나보내고, 내일을 맞이하겠지요.


이석원 에세이.jpg



비록 시들 운명을 알아도

꽃은 최선을 다해 피어나고, 바람에 흔들리고, 향기를 뿜고, 후회 없는 오늘을 살고,

처연하게 고개를 떨구고,


우리 역시 꽃이 시들걸 알지만, 그저 그 모습 자체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 아닐까요.


나의 꽃으로, 너의 꽃으로, 사력을 다해 사랑하는 우리가 되길.



※ 곡을 들으시려면

https://youtu.be/bbqr6NkJ88A?si=7I_Vi47XtqRRqXi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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