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만으로 (원슈타인)
폭풍우 치는 밤에라는 애니메니션에서 늑대 가벼와 염소 메이
너무나 유명한 톰과 제리
빨강머리 앤에서 앤과 길버트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한없이 다정하고 스윗한 커플들의 모습은 아니에요.
가부와 메이는 사실은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먹이사슬의 관계이고,
톰과 제리는 매번 괴롭히고, 당하는 상극의 관계로 보이고,
앤과 길버트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로 보이지만,
우리는 알죠.
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당사자만 모르지만, (어쩌면 안그런척, 모르는척하는 것일 수도 있는) 깊은 사랑과 신뢰가 있는 관계라는 걸
사랑의 표현방식은 따뜻한 눈빛, 달콤한 말투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주인공만 모르고 세상이 다 알고, 우린 그들을 보며 유쾌한 응원을 보내며 바라보죠.
저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다정한 말투, 스윗한 고백에 익숙해서
가부가 메이를 얼마나 아꼈는지, 톰이 제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랐던 것처럼
그가 나를 생각은 하고 있는지,
그가 나를 좋아는 하는지,
의심하고, 불안하고, 서운하고, 그래서 망설이고, 작아졌던 때가 있었어요.
자신의 삶의 무게와 신념이 곁에 있는 이를 외롭고 힘들게 할까 봐
움츠려 들고, 뒷걸음질 치는
사실은 가장 여리고, 가장 배려싶은 마음을 가진 그는
꽃이 활짝 피면 더욱 속수무책일 테니 봉우리를 틔우기 전, 도망가 바라보지 않을 작정도 했고,
모진 말로 꽃을 보고 절대 피우지 말라 엄포를 놓기도 했어요,
햇살과 바람 앞에 꽃이 피는 건 당연한 순리인데,
마치 마음만 먹으면, 의지만 다지면 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어른 바보'였죠.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을 흘러넘치게 쏟아내야 스스로가 행복한 여자와
팔 한쪽을 잘라내서 줄 수 있을 만큼, 내 목숨을 대신 내어주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이 되어야
그제야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남자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마음이어도,
불행히도 같은 감정의 다른 표현방식에 서로 공감하는 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그 과정에서 걸음걸이의 보폭과 호흡의 속도가 달라 영영 남이 될 뻔하기도 했고요.
다른 남자들이 퍼부었던 애정공세도 없고, 늘 선인장처럼 가시를 세워두고 거리를 두었던 남자가
내게 마음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남자는 말의 무게가 지구의 무게만큼 크고 무거운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마음에 책임을 지고, 지키지 못한 말에 부끄러움이 없길, 그것을 평생의 신념으로 사는 사람
가족에게, 지난 연인에게, 본인의 삶을 대하는 모든 과정을 천천히 지켜보고서야 알게 되었어요,
그제야 그동안의 서운함은 안심이 되었어요
'아, 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건 사막에서 새벽의 이슬을 모으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그 마음은 평생 마르지 않는 나만의 깊은 숲 속 옹달샘이 되어 나를 적시고, 나를 살리겠구나'
작은 체구, 소심한 마음을 가진 것 같은 그녀가 성큼성큼 겁도 없이 다가오는 것이
순간의 끌림일까, 하룻밤의 꿈처럼 깨면 사라질까,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운 마음은 아닐까,
조금만 힘들면 토라지고,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사실, 여자는 그저 오늘을, 지금을, 순간을 후회 없이 사는 사람이었어요.
사랑에도 삶에도 지금 아낌이 없는 사람,
'내 인생에 한 번쯤은 내가 남자니까, 어른이니까, 보호자니까가 아니라, 그저 어리광도 피우고, 싱거운 농담도 하면서 쏟아지는 햇살처럼 그녀에게 따뜻하고 밝은 기운을 받으며 웃을 수 있는 시간 -욕심 내어봐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래서, 엇갈린 운명 속에 영원히 타인이 될 뻔한 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치게 애틋했고, 운명에게 애원했고,
일부러, 기어코 결말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길을 잃고, 막막한 그 흙길을 맨발일지언정 같이 걷길 바랐고,
드디어, 이윽고, 끝내, 마침내 눈물과 인내로 만든 우리만 아는 우리만의 기적을 만들어 가기로 합니다.
우리의 아프며 잠들었던 밤은 내일을 꿈꾸는 밤이 되고,
우리의 불안했던 새벽은 기대로 가득 찬 아침이 되고,
우리의 눈물은 햇살이 되었어요.
너는 내게, 나는 네게
"존재만으로" 힘이 되고, 웃음이 되고, 용기가 되는
내 마음의 별, 꽃, 바람, 하늘
내 우주의 중심
여전히 톰은 제리를 괴롭히고,
길버트는 앤을 놀리지만,
이제는 그 퉁명한 표현이, 안 그런 척하는 말투가 다가 아니란 걸,
진짜 마음은 저기 깊은 곳에 숨겨져 있고,
그건 나만 볼 수 있다는 걸, 내 눈에만 보이는 걸 감사하고 행복해할 수 있게 된 이윽고의 시간
툴툴거리지만 구두 속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내 주고,
돌아가는 차를 한참을 뒤따라 오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배웅을 해주고,
내가 감사인사할 타이밍에 동시에 차에서 뛰어내려와 나 대신 반듯하게 감사인사를 해주고,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차가워진 김밥을 먹으며 마지막까지 손을 잡아주었고,
먼저 끊어 - 이 사소한 말에 행복을 느낄 줄 아는
그 남자를 '오랫동안' 웃게 해주고 싶다.
너의 존재만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나
나의 존재만으로도 웃음과 용기를 받는 너
※원곡을 들으시려면
https://youtu.be/KTFWCLeqn04?si=YhTNalefETEVVC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