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에서 '여배우'/'여성 배우'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표현을 지양하고자 하지만 여성 배우들만 나오는 공연의 특성상 리뷰에서 이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던 점 양해 바랍니다.
뮤지컬 <리지(LIZZIE)>를 보고 왔다. 개막 전부터, 락 뮤지컬+여성 중심 서사+여성 배우들만(!) 나오는 공연이라는 점 때문에 <리지>에 대한 관심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었다. 특히 여배우들만 나온다는 것. 이건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는 다른 걸 다 차치하더라도, 그러니까 가격이 비싸도 내용이 별로여도(급기야...)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요소였다. 지금까지 무대 위를 남자 배우들이 채운 경우는 수많은 공연에서, 사실 거의 대부분의 공연에서 봐왔지만 반대의 경우는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다.
기쁘게도 필자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리지>는 개막 전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다. 개막 이후에도 뜨거운 기대를 반영한 듯이 흥행 중. 하지만 <리지>에 대해 아쉬움이 담긴 평가들도 쏟아져 나왔다. 물론 필자에겐 위에서 말한 대로 일단 무조건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얼마 전 다녀왔다. 늘 그렇듯이 사람들의 평가는 정확하다. 좋은 점도 명확하지만, 좋지 않은 점도 명확한 극이었다.
뮤지컬 <리지> 공식 포스터(출처: 쇼노트 공식 홈페이지)
좋았던 점부터 이야기하자. 일단 다양한 음역대의 노래를 부르는 여배우들을 보는 것이 짜릿했다. 이 날 본 4명의 배우 중 3명은 다른 공연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이들이 가녀린 음색과 고음의 노래를 부르는 것만 들어왔다. 여배가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남배와 함께 듀엣인 경우가 많고, 여배 솔로라고 해도 '전형적'으로 요구되는 여배 음역대가 있으니까. 그런데 <리지>에서는 다르다. 락 뮤지컬이기 때문에 고음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낮은 음역대로 노래가 시작하거나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배우가 한 노래의 첫 시작을 아주 저음으로 시작했을 때의 그 짜릿함. 여기서 이미 나는 이 공연을 보러 온 가치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뮤지컬 <리지> 출연 배우들. (출처:https://www.mhn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0829)
배우들의 좋았던 점을 이야기를 하자면 정말 끝도 없다. 사실 좋았던 점의 1부터 100까지가 전부 배우들 이야기다. <리지>가 가지는 여러 특성상(락 뮤지컬이라는 것, 그리고 후에 이야기할 안무/연출의 특징)으로 인해서 <리지>는 배우들이 감정을 끌고 가기가 힘든 공연이다. 그럼에도 배우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의 감정은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됐다. 특히 자유를 박탈당했던 상황에서부터 되찾아오는 상황까지 폭넓게 표현해야 하는 리지는 참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는데, 이 날 공연에서 리지 역의 배우는 짜릿할 만큼 연기가 좋았다.
뮤지컬 <리지> 공연사진(출처:http://m.newstage.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908)
자, 이제 좋지 않았던 점/나빴던 점을 이야기해보자. 사실 이건 개인적인 취향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필자는 뮤지컬 안에서 안무가 개입되는 순간을 낯설어한다. 무대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 설정에 몰입하고 있다가 안무가 시작되면서 갑자기 날 끄집어내는 느낌이 들어서. 안무가 뮤지컬의 주요한 매력 중 하나임에도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 조금 민망하다. 다행히도(?) 스토리 전개 상 자연스럽게 나오면 괜찮다. 그런데 <리지>는 안무가 너무너무 곳곳에서 어색하게 느껴졌다. 특히 'Why are you all these heads off?' 넘버에서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지금 스토리 상 벌어지고 있는 일에 비해서 안무가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그리고 얘기가 아주 많이 나오고 있는 연출. 사실 연출이 무대에서 끼치는 영향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여전히 긴가민가하긴 하지만... <리지>를 보면서 느낀 건 연출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무대 위의 스탠딩 마이크. 스탠딩 마이크가 여러 장면에서 자주 쓰이는데, 몇몇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마이크를 굳이 굳이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뮤지컬 <리지> 공연사진 (출처: http://www.hani.co.kr/arti/PRINT/943458.html)
무대 위에서 사용되는 어떤 장치가 있다면 그 장치가 무대 위에 있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의미가 관객들한테 와 닿아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없다면 그 장치는 그냥 군더더기일 뿐이다. 마이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일단 락뮤(....)라서, 그리고 이 마이크가 인물들의 '발언권'이랄까 그런 걸 상징하는 것 같은데 굳이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겠다, 정도의 느낌이다. 사실 뮤지컬인지라 배우들의 얼굴에 마이크 하나씩 붙어있고, 그런데도 스탠딩 마이크를 쓴다면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안 느껴지니까 그냥(...) 이상했다.
뮤지컬 <리지> 공연 사진 (출처 : http://m.newstage.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908)
하지만 가장 아쉬웠던 건 <리지>가 하고 싶은 말이 조금은 낡았다는 것이다. <리지>의 주제는 아주 명확하다. 여성의 자유, 여성의 해방. 그런데 이제 관객들이 공연에서 원하는 건 그 이상이다. 자유/해방만 주어진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관객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자유를 얻었는가. 가 중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이 자유를 되찾는 과정에서의 '주체성'이 핵심이다.
사실 <리지>에서 표현되는 살인은 그저, 학대로 인해 '미친' 여자가 여러 사건들로 인해 광기를 참지 못하고 결국 터트린 결과일 뿐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1막이고, 2막에서 표현되는 리지의 모습은 이런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리지는 1막에서 더듬더듬 이야기하고 어딘가 풀려있던 눈빛을 보여주는 것과 다르게 2막부터는 똑 부러진 말투와 단호해진 눈빛을 보여준다. 의상도 2막부터 확 달라지는데, 이를 통해서 억압 아래와 밖에서 여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억압 아래 만들어졌던 광기가 사라지고 '이성'적 판단으로 감옥에서 풀려나는 과정은 꽤나 흥미진진하다.(당시 배심원들이 갖고 있었던 '여성'에 대한 편견을 '이용'하는 듯한 모습이 좋았다.)
뮤지컬 <리지> 공연 사진. 왼쪽은 1막, 오른쪽은 2막 사진이다. 1막에서는 당시 여성들의 옷 스타일을 반영하는 의상이었다가 2막에서는 '락뮤지컬'에 맞는 의상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건 2막의 이야기고 1막에서의 살인은 광기 아래 '우발적'인 행동으로 나온다. 심지어 이런 부분이 아주, 많이, 부각되어서. 중요한 건 <리지>의 실제 사건은 미제 사건이고, 리지가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죽였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죽였다 하더라도, 광기를 이기지 못하고 죽였는지 아니면 정말 철저한 계획 아래의 살인이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물론 실제 사건에서 리지의 증언이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전자일 가능성이 크긴 하다.) 다시 말하자면 이 부분을 자유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내용을 바꿀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리지>가 해외 공연을 들여온 것이니 원작에서 그런 내용이라면 어쩔 수 없나 싶다가도(게다가 <리지>는 2009년에 초연이 된, 11년이나 된 공연이다.) 그래도 한국에서 공연되는 것이고, 지금은 2020년이라는 점에서 연출이나 배우의 해석(사실 솔직히 공연에서 배우가 얼마나 해석의 자유를 가질 수 있는지 의문스럽기는 하다. 그렇다고 모두 연출의 잘못인 건 아니겠지만,... 뭐 아무튼.)으로 리지의 살인에 있어서 '주체성'을 더했다면 공연의 만족도가 훨씬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래도 뮤지컬 <리지>는 충분히 한 번쯤, 아니 나오는 배우들을 전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공연이었다. 맘껏 뛰놀라고 깔아준 판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여자 배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연 값의 가치 그 이상을 해내니까. 그리고 바라본다. 여성 중심 서사+여배우들만(!) 나오는 공연들이 더더욱 많이 생기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