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바실레이비치 라흐마니노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그는 극악의 난이도(피아노 전공생들이 라흐흑라흐흐흑 운다는 썰이 있더라(...))를 가진 곡으로 유명하지만,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가 종종 붙을 만큼 인기 있는 인물이다. 이런 그를 소재로 한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라흐마니노프 본체가 그러하듯 2016년 초연부터 2018년 재연까지 꾸준히 사랑받아왔다. 1년 반 만에 돌아온 '라흐마니노프'는 초연, 앵콜, 재연을 모두 함께한 배우들이 아닌 올뉴캐로 돌아왔지만, 라흐마니노프가 가진 위로의 힘은 여전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여전했고, 과거와 달라진 점은 물음표로 남았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공식 포스터(출처:HJ컬쳐 공식 트위터. 아래 사진과 막공 날짜가 다른데 위 사진이 맞다. 코로나로 2주 휴식기를 가졌고 최근 연장했다!)
'닫혀있던 나를 어루만진 그 울림을'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 발표 후 이어진 악평에 마음의 문을 닫고 3년 간 칩거하는 라흐마니노프를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이 치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관객들은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아픔을 찾아가는 과정을 목격한다.
라흐마니노프가 겪고 있는 일은 작곡을 할 수 없는, 어떤 면에서 보면 작곡가만이 가지는 특수한 상황이지만 사실 모든 이에게 한 번쯤은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데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나도 그런 나를 이해할 수가 없고, 해야한다고 계속 생각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이럴 때 우리가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면 극복할 수 있다' 혹은 '이렇게 놀고 있으면 안 된다, 지칠수록 해야만 한다'와 (강요 같은) 조언이나 충고 같은 말들이다. 이걸 쓰다 보니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한 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잔소리는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쁘다는 말.
출처 : TvN 유퀴즈온더블럭 영상 캡처
라흐마니노프는 달 박사가 등장하자마자 불쾌함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만나온 점성술사, 목사, ... 등은 그에게 무언가를 계속해주려 했고 달 박사도 그러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달 박사는 그를 치료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이 말을 듣고 환장하는 라흐마니노프가 킬포.) 그는 치료하려 한다기보다는 라흐마니노프와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사실 라흐마니노프가 누구보다 말하고 싶어 '안달 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우리 모두 누구나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걸 말하기를 원할 때도 있지만 묻어두기를 원할 때도 있다. 하지만 묻어두는 것만으로는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언젠가는 말을 해야겠지만, 그걸 말하고 싶은 나만의 타이밍이 있고 때로는 말할 타이밍이 오기 전까지 스스로를 다독일 시간이 필요하다. 라흐마니노프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지만 너무나 많은 '소리'가 그를 괴롭힌다.
달 박사는 그런 라흐에게 처음으로 '기다려준' 사람일지도 모른다. 뭐 물론 자기 나름대로 어그로를(...) 끌면서 기다려주지만.(달 박사는 극 중에서 비올라를 켜면서 라흐마니노프 옆을 얼쩡거리는데, 끼익끼익거리면서 '형편없는' 비올라 연주를 하면 미치고 팔짝 뛰는 라흐마니노프가 또 다른 킬포다.)
관객들은 공연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상황을 무대 위 인물에게 투영하게 되는데,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를 통해서는 상처 받은 나를 라흐마니노프에게서 보게 된다.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점차 열고 달 박사에게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위로를 받는다. 그가 곧 나니까. (게다가 라흐마니노프가 겪은 아픔은 생각보다, '한국적'이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강압적인 선생님, 과정이 아닌 결과를 강조하는 사람들까지.)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는 내용뿐만 아니라 <라흐마니노프>는 보러 갈 이유가 2개나(?) 더 있다. 바로 올뉴캐의 배우들과 피아노. 사실 이번 <라흐마니노프>의 캐스팅이 공개되었을 때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배우들이, 이 공연을? 아, 물론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너무 의외라서. 필자가 애정하는(a.k.a 본진) 배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단 <라흐마니노프> 제작사와 일하는 것도 처음, 이렇게 예민하고 우울한 역할도 처음, 그냥 온통 처음이었다. 다른 배우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출연진. (출처: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0/03/04/2020030400031.html)
공연의 가장 큰 매력 중에 하나는 같은 역할을 하는 여러 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라흐마니노프>의 경우 초연/앵콜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초연을 올릴 때 출연한 배우들의 해석이 캐릭터 설정 자체에 많이 개입되기도 하고, 두 시즌을 연달아 같은 배우들로 같은 캐릭터를 보다 보니 그랬던 듯.)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웬걸, 첫 공에서부터 헛된 고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그리고 다른 느낌의 라흐마니노프와 니콜라이 달이 무대에 있었으니까.
88개의 건반, 88개의 소리.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또 다른 주인공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피아노를 맡은 김여랑, 김기경 피아니스트.(캐슷보드에서 직접 잘라 올린 사진이라 화질이 좋지 않다ㅜㅜ)
그리고 피아노. 농담이 아니라 첫 공을 보면서, 내가 고작 이 돈으로 저 배우들의 연기와 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같이 들어도 되는 걸까 고민했다. 물론 그전에 라흐마니노프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았던 피아니스트도 뛰어났지만, 와 이번에는 정말... 말을... 잇지 못하겠다.(?) 본진인 배우가 있음에도 솔직히 커튼콜 때 피아니스트한테 더 큰 박수를 쳐준 적도 있다.(?)
게다가 더 짜릿한 건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느낌이 다르다! 김기경 피아니스트는 파워풀하면서 강렬하다면 김여랑피아니스트는 화려하면서 굴러가는 느낌이 드는 연주를 선보인다. 공연에 잠깐 주어지는 피아노 독주 타임(a.k.a 경피타임/랑피타임)과 커튼콜의 연주만으로도 이 공연을 보러 갈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자, 여기까지가 좋은 점. 쓰다 보니까 길어져서 다음 편으로 넘겨야겠다. 왜냐하면 <라흐마니노프>는 단점도 아주아주 명확한 극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