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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지만 불친절한, 쉽지만 어려운

낡은 소재들의 어색한 결합, 뮤지컬 <로빈> 후기 1

by 한성

※글의 특성상 뮤지컬 <로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코로나가 확산된 이후, 공연계는 급속도로 상황이 안 좋아졌다. 너무도 당연하게 수많은 사람들이 밀폐된 공간에 모이다 보니 사회적 거리두기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맞았기 때문이다. 일부 공연은 공연장의 특성 혹은 제작사의 상황으로 막이 오르기도 전에 연기되거나 취소되기도 했다.

지금 올라오고 있는 공연들은 이렇게 눈물 나는 상황에서 힘겹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뮤지컬 <로빈>은 수차례 연기되다가(아무래도 강남에 위치한 한 회사 건물에 있는 공연장의 특성 때문에 그런 듯하다.) 개막했다. 그래서 그런지 묘하게 애틋했다. 또한 개막 전에 공개된 로빈 OST 음원(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의 평이 좋았기 때문에, 애틋함과 호기심을 품고 <로빈>을 보고왔다.

뮤지컬 <로빈>은 생각보다 어려운 극이었다. 쉬운 듯 하지만 어려운. 친절한 듯 하지만 불친절한.

뮤지컬로빈_포스터_상상마당.jpg 뮤지컬 <로빈> 포스터(출처 : https://www.sangsangmadang.com/show/detail/1746)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가족극'


일단 쉬운 점부터 얘기해보자. 예매처에 공개된 시놉시스, 인물 소개 등을 보면 <로빈>은 전형적인 가족극이다. 특히 부녀 이야기.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과 아빠 로빈과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과 딸 루나. 공간과 상황의 특성(우주 벙커에 단 둘+레온이라는 로봇만이 있다는 것)때문에 그들의 갈등이 더욱 격화된 듯 보이긴 하지만 사실 아주 전형적인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양상이다.

아빠는 딸의 생각과 감정이 궁금해서 무작정 다가가지만 어릴 때와 달리 커버린 딸은 자신만의 세계가 생겨있고, 다짜고짜 그 세계를 침범하려고 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 일주일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빈이 딸 루나에게 찾아가 한 번 안아보자,라고 할 때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로빈의 마음도 너무 이해하지만, 딸 입장에서는 나의 방에 무단 침입해서(...) 갑자기 안아달라고 하면 누가 안아줄까.(그런 의미에서 로빈과 루나라고 이름이 되어있지만 이 가족들 너무 한국적이었다(...))

뮤지컬로빈_공연사진2_이데일리.jpg 출처 :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689206625772200&mediaCodeNo=257>rack=sok

그래서 로빈과 루나의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쉬웠다. 사실 대놓고 보여준다. 특히 루나의 소설 같은 경우에는 소설에서 비유하는 '솔라'가 루나라는 것, '섬'이 우주라는 것, '새'가 아빠라는 것까지 듣자마자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솔라는 태양, 루나는 달이기도 하고. 갇혀있다는 상황이 너무 똑같기도 했다.) 그래서 아빠와 딸 이야기를 할 때는 다소 투박하다. 로빈이 죽을 날이 점점 다가오면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전형적으로, 어때. 감동이지? 자 여기서 눈물을 흘려! 이런 느낌을 줄 정도다. 많은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그러니까 아 울기 자존심 상하는데 울고 있네? 딱 이 마음이 로빈과 루나가 나올 때마다 들었다.


복제인간의 등장,

인간과 감정의 의미를 묻다


하지만 <로빈>은 의외성을 가지고 있는 공연이다. 바로 복제인간의 등장 때문이다. 개인에 따라 반전일 수도, 예상될 수도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로빈>은 홍보와 시놉시스, 인물 소개, 초반 내용까지 전부 가족을 소재로 한다는 걸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의외라고 표현해보았다.(사실 필자는 보면서 예상을 한 터라, 그리 의외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겠다.)

공연의 중반쯤, 숨겨져 있던 사실이 밝혀지는데, 지구에 방사능이 퍼지면서 로빈과 루나, 레온이 우주로 떠나올 때 이미 로빈이 로빈이 아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지구에서 인간 로빈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복제된 로빈(뉴빈)을 루나, 레온과 함께 우주로 보냈던 것이다.(여기서부터 우주에서 살고 있던 로빈을 뉴빈이라고 표현하겠다.)

뮤지컬로빈_공연사진_MK.jpg (출처 :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20/05/556286/)

뉴빈은 자신이 우주에 있는 동안 느꼈던 감정, 다시 말해 루나를 향한 사랑에 대해 고민한다. 인간 로빈이 자신의 기억까지 모두 옮겨두었기 때문에 루나가 태어났을 때의 감정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루나의 진짜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혼란을 정리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애초에 뉴빈은 10년 수명을 가지고 있었고 거의 죽기 직전(공연 상 한 D-5에 알게 되는 것 같다. 가물가물하지만...)에 진실을 알게 된 터라 빠르게 마음을 정리하고 자신이 루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알려준 루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을 주기로 결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문단의 일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적어도 2시간 안에 공연이 끝나야 하니까(...)).

뉴빈에게 이 일이 갑작스럽듯이 관객에게도 갑작스럽지만, 충격을 정리하기에 관객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그리 쉽게 정리될 수 있는 일도 아닌 데다가 복제인간이라는 소재가 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의문만 해도 복제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복제인간이 가진 감정은 복제인간의 것인가 아닌가. 복제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있어서 복제인간의 의지는 없다고 볼 수 있는데 그건 과연 '정당'한가. 등등. 그런데 이걸 '부성애'로 포장한 다음에 뚝딱뚝딱해서 정리하고, 새로운 뉴빈(뉴빈이 죽기 전 만든 또 다른 복제인간 로빈이다.)과 루나, 레온이 떠난 뒤에 남겨진 뉴빈을 보여준 뒤 공연은 끝난다. 그래서, 이 공연은 불친절하다.


조금은 낡아버린 소재, 복제인간과 로봇


하지만 그렇다고 복제인간과 로봇이라는 소재가 그렇게 '신선한' 것도 아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복제인간과 로봇의 이야기를 한 지 아주 오래되었다. 그러나 공연(연극, 뮤지컬)에서는 이런 소재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꽤 오래된 작품으로는 프랑켄슈타인이 있지만 사실 근데 이 작품은 원작이 있는 셈이니까. 하지만 최근 4-5년 안에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어쩌면 해피엔딩>, <이토록 보통의>다.

그런데 <로빈>을 보면서 두 작품 생각이 너무너무너무 많이 났다. 덕후들이 말하는 용어로는 '지뢰'라고 하는데, 사실 지뢰가 많은 건 어떤 면에서 이 작품이 그다지 참신하지 않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물론 <로빈>이 부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어햎이나 이보통과 내용적으로 아주 유사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뢰가 된 이유는 복제인간과 로봇이라는 소재가 공연계에서도 이미 낡아버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낙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다뤄졌기 때문에 공연 중에서 <어쩌면 해피엔딩>과 <이토록 보통의>도 복제인간과 로봇 이야기의 막차를 탄 셈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 두 소재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결국 기계 혹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무언가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 즉 '감정'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로 귀결되기 때문.

어햎과 이보통에서는 연애적 감정을 이야기하고 <로빈>은 부성애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모두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로빈>의 세트도 배우들의 의상도(...) 매우 미래적이지만 내용이 뻔하다고 느껴졌고, 앞에서 말했다시피 사실 필자는 공연의 처음부터(...) 뉴빈의 반전을 눈치채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소재의 이야기. <로빈>의 후기는 너무 길지 않게 쓰고 싶었는데, 사실 낡은 두 소재가 어색하게 섞여있다는 것 + 친절할 땐 너무 친절하고 불친절할 때는 너무 불친절하다는 것(...) 말고 더 찜찜한 게 있어서 다음 편으로 넘긴다. (2편 : https://brunch.co.kr/@hansung-culture/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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