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독재시대. 주변 인물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숙청되는 피의 시기에고위 간부로 일하는 맨과 그런 맨을 생각하며 불안에 떠는 우먼이 있다.이들에게 누군가 찾아오고('비지터'). 우먼과 맨은 혼란 속에 빠져드는데....!
<미드나잇 - 앤틀러스>, <미드나잇 - 액터 뮤지션>(이하 <미드나잇>)의 기본 줄거리다. 개인적으로 그리 끌리는 내용은 아니었다. 맨과 우먼의 성격도 그렇고, 낯선 이방인이 찾아와 이들을 흔들어 놓는 것도 그렇고. 신선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미드나잇은 익숙한 내용 전개에서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시놉시스와 공연 중반까지 뻔했던 내용에서 전개가 휙, 비틀어지면서 이미 많은 작품에서 이야기되어버린 인간의 '악마성'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결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포일러가 가득 담긴 후기를 아래에 쓰기 전에 말하고 싶다. 여러분, 미드나잇 보세요!
미드나잇 시리즈 포스터, 앤틀러스는 막을 내렸고 현재 공연 진행 중인 건 미드나잇 액터뮤지션이다. (출처 : http://m.sports.khan.co.kr)
※글의 특성상 미드나잇 앤틀러스, 미드나잇 액터 뮤지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구나' 악마죠, 때로는.
맨도, 관객도. 그리고...
미드나잇의 공간적, 시대적 배경은 스탈린의 독재시대. 공산주의 혁명 당시 처음 꿈꿨던 유토피아는커녕 자유가 완전히 소거된 시기다. 살기 위해 무고한 이들을 고발하기까지 하는 때. 이런 배경은 인물들의 악마성을 끌어낸다. 내가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특히 맨에게는 우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나와 우먼을 지키기 위해 맨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엔 합리화하기 위한 이유일 뿐인 데다 맨은 보다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말로 포장해주기에 맨의 죄악은 너무나 끈적하다.
우리는 이런 맨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나라면 어땠을까. 그래서 한 넘버의 가사 '누구나 악마죠, 때로는'은 의미심장하다. '누구나'에는 우리 모두를 포함하니까. 그래서 앤틀러스에서 이 대사가 나왔을 때는 마치 관객들마저도 비지터의 할당량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나'의 범위에 포함되는 건 맨, 관객을 넘어 또 다른 등장인물 '우먼'까지다. 사실 오히려 맨보다 우먼에게서 인간의 악마성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여기가 미드나잇이 제일 의외였던, 그리고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이었다.
woman(여성)을 통해 보여주는 man(사람)의 악마성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의 공연 사진. 왼쪽부터 우먼, 맨, 비지터, 피아니스트.(출처 : 뮤지컬 미드나잇 트위터 공식 계정)
공연의 시작부터 우먼은 계속해서 불안에 떨고 있다. (남들을 고발하고도) 태평해 보이는 맨과 달리 우먼은 끝도 없이 맨에게 예민하게 군다. 사실 공연을 처음 볼 땐 짜증 났다(...) 하지만 공연 후반쯤 이렇게까지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등장한다. 바로, 우먼이 맨을 고발했기 때문. 이 사실이 은연중에/대놓고(앤틀러스는 전자, 액터 뮤지션은 후자) 드러내면서 우먼의 초반 모습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또한 공연의 중반부터는 우먼의 숨겨진 모습이 나온다. 맨의 고발을 비판했던 우먼이 알고 보니 맨과 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지고, 변명하던 맨의 말을 우먼이 거의 그대로 한다. 관객들은 같은 일을 저지르고도 맨을 태연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우먼의 이중적 태도를 깨닫게 되면서, 우먼의 겉모습은 우먼의 전체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납득할만한 서사, 우먼에 대해 설명하다
''누구나' 악마죠, 때로는'을 보여주는 이 공연은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고 있지만 너무나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 비정하거나 악한 성격을 남성 캐릭터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함, 폭력성 같은 특징을 여성과 연결시키는 공연은 많지 않았다.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의 우먼.(출처: 뮤지컬 미드나잇 트위터 공식 계정)
또한 우먼이 폭력성과 악마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명확히 등장하는데, 다시 말하면 드디어 여성 캐릭터에게 서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맨과 비슷할 정도로 말이다. 맨이 다른 이들을 고발하고 공연 마지막 최후의 선택을 하는 이유는 맨에게 우먼이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다.(사실 앤틀러스에서는 이게 아주 명확하게, 액터 뮤지션에서는 긴가민가하게 드러나지만 필자가 본 날의 액터 뮤지션 맨 역할 배우의 노선은 우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느껴졌다.) 우먼에게는 그의 아버지가 이런 역할을 한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상징하면서 우먼의 정신적 지주인 아버지. 그래서 우먼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모욕하는(우먼 기준.) 비지터를 목졸라 죽인다(!)
이후의 모습은 더욱 흥미진진하다.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맨과 이미 벌어진 일이라며 상황을 정리하려고 하는 우먼의 모습은 맨이 약하고 우먼이 강하다는 걸 보여준다. 공연 초반에 눈 앞에 펼쳐졌던 두 사람의 성격이 완전히 뒤집히고, 우먼이 맨을 지켜주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공연은 발칙하다. 고정관념 속의 여성과 남성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이를 뒤집어버리니까. 게다가 공연 중반까지 우먼에 대해 서사적으로 불친절했다가 우먼의 아버지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급격하게 '친절'해지기 시작한다. 또한 비지터와 맨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두 사람의 경쟁구도 속에서 그 안에 끼인 존재로만 그려졌던(우먼이 비지터에게 기습키스를 당하는 장면까지 있다(!)) 우먼은 내용의 중심으로 우뚝 서고, 공연은 우먼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연으로 바뀌어버린다. 다시 말하자면 주인공이 우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누군가에게는 천사, 누군가에게는 죄책감.
비지터는 누구인가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의 비지터, (출처 : 뮤지컬 미드나잇 트위터 공식 계정)
<미드나잇>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비지터의 존재다. '비지터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들고, 공연을 보는 이들마다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드나잇 - 액터 뮤지션>을 보러 간 날 함께 다녀온 친구는 맨과 우먼의 '죄책감'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인간의 죄악을 견디다 못해 타락한 천사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서 그날 배우의 노선이 아주 '거칠었기' 때문에 후반부에는 급기야 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맨에게 '감히 내게 명령을 해!'라는 대사를 외칠 때의 모습이나 공연 전반적으로 모든 걸 조종하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아슬아슬한 경계선,
자칫하다간 불편해진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공연이 여성에 대한 고전적인 편견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먼이 처음부터 예민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엔 급기야 누군가를 죽이기까지 하는데, 이가 감정의 폭발과 악마성의 등장 사이의 경계선에 서있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공연은 약간 전자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여성은 신경질적이고 예민하다'는 아주 오래된 편견에 동조하는 것 같아 아주 조금은 불편했다.
(다행히 필자가 보러 간 날의 배우가 우먼의 악마성을 강조하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배우의 디테일에 따라 공연의 느낌이 달라지고 배우가 '적절한' 노선을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기본적인 공연의 틀에서 정해주는 바가 있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왼쪽이 미드나잇 앤틀러스, 오른쪽이 액터뮤지션이다. 사진만 봐도 무대가 아주아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출처 : 뉴스컬처/뉴데일리)
이 글에서는 미드나잇의 우먼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미드나잇 앤틀러스와 액터 뮤지션을 비교하는 내용을 다루지는 못했다. 아주 짧게만 이야기하면 두 공연은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무대와 연출을 가지고 있어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여백의 미+한국적인 취향이 담긴 건 앤틀러스, 직관적+외국적인 취향이 담긴 건 액터 뮤지션이다. 두 작품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두 공연이 동시에 다른 공연장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 앤틀러스만 보고 앤틀러스가 막을 내린 후에 액터 뮤지션을 보러 가게 된 거라 상당히 아쉬웠다. 혹시 두 공연이 또 같이 올라가게 된다면 짧은 텀을 두고 동시에 보러 가는 것도 좋을 듯.
결론은 미드나잇은 참, 정말, 아주, 재밌는 공연이었다는 것이다. 넘버도 다 좋고, 내용도 흥미진진했고, 배우들 모두 연기와 노래 다 좋았기 때문에 아주 아주 아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