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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프리의 나쁜 예?

연극 <어나더 컨트리>의 캐스팅에 대해

by 한성
<어나더 컨트리> 공연 사진. 첫 번째 줄 왼쪽을 시작으로 처음 서있는 사람이 워튼 역의 김리안 배우다. (출처: 어나더 컨트리 트위터 공식 계정)

1,2년 사이 공연계의 가장 큰 변화를 이야기한다면 젠더 프리 공연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펀스, 해적, 도리안 그레이, 비클래스 ...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 남자 배우들이 맡은 역할을 여자배우가 같이 맡는 식으로 많이 진행됐는데, 인물의 이름을 바꾸고 성별도 여자로 바꾸는 경우도 있었지만 '남자' 캐릭터 자체를 여성 배우가 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의 경우엔 후자인데, 김리안 배우가 워튼 역할을 맡았다. 필자는 재연으로 올라오는 어나더 컨트리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워튼 자체가 공연 내에서 자그마하고 위축되어있는 이미지라 여자 배우를 캐스팅한 것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필자는 '까더라도 보고 까자'(...)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연을 어제 보러 다녀왔고, 이제 까려고 한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 워튼 역의 김리안 배우 콘셉트 사진(출처: 어나더 컨트리 트위터 공식 계정)


자그마하고, 위축되어있으며,

억압 아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캐릭터를

굳이,(!!!!!) 여자 배우에게?


1930년대 영국의 한 학교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연극 <어나더 컨트리>. 이 학교의 규율은 아주 억압적이고 엄격하고, 저학년은 고학년을 위해 사실상 봉사(...) 해야 한다. 워튼은 저학년이고, 따라서 극 중 등장인물들의 각종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한다. 규칙상 고학년+학생회+선도부의 명령은 (거의) 무조건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체벌(엉덩이 6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워튼에게 윽박지르는 장면, 화내는 장면, 모욕하는 장면 등 아주 다양하게 워튼을 향한 억압이 펼쳐진다. <어나더 컨트리>의 기숙사가 얼마나 억압적인 공간인지 보여주는 장치로서 워튼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워튼은 초연 때도 이미지상 피지컬적으로 자그마한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그래, 피지컬상으로는 여자배우(특히 김리안 배우는 '여배우 평균에 비해서도' 키가 작은 편인 것 같았다. 사실 다른 남자 배우들의 키가 너무너무 다들 커서....(...) 제대로 본 건지는 긴가민가하긴 하다.)를 캐스팅한 이유를 너무나 잘 알겠다. 그런데 그래서 더 문제다. 젠더 프리라는 것이 여배우들이 지금까지 맡아왔던 '전형적인' 캐릭터를 벗어나 다양한 캐릭터를 맡는 것에 의의가 있는데, 이를 완전히 들어 엎어 버리는 캐슷이라니.

2019년 초연 캐슷. 왼쪽에서 두명이 워튼역이다.(출처:http://www.tvj.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409)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피지컬적인 전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물 서사의 전형성에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공연 내내 워튼은 상급생들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반항은 고작 티타임을 위한 잔과 접시를 세게 내려놓기. 심지어 명령 듣고 명령받는 '개'로 비유되기도 하고(근데 사실 너무 맞는 말이다. 명령에 따라서 이행하고 잘했어, 칭찬 듣고. 칭찬도 토미만 해줄 뿐 나머지는 명령 이행을 너무나 당연시한다), 기숙사 관행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심지어 이것도 먹다 남은 머핀이다.)을 받으려는 워튼에게 가이가 머핀을 집어던지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진 머핀을 줍기도 한다. 진짜 개 취급이다.(...)

이런 역할을 여배우한테 맡긴다는 것은 젠더 프리에 먹칠을 하는 일이다. 물론 여배우라고 해서 무조건 당당하고 거친 역할만을 맡아야 하는 건 아니다. 이것 또한 전형성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하지만 10명의 캐릭터 중에 굳이 워튼만 콕 집어서 여배우를 캐스팅한 건 너무나 속 보인다(...) 피지컬적으로, 인물 서사적으로 여배우의 이미지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겠지. 특히나 김리안 배우처럼 왜소하고 귀엽게 생겼다면 더욱. 그래도 젠더 프리를 한다는 건 사실 위험부담이 좀 있고, (기존 설정과 다르게 가는 거니까.) 이런 부담을 감수하겠다고 한다면 그럴만한 의의가 있고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어나더 컨트리>의 이번 젠더 프리 캐스팅에는 그런 게 없다. 오히려 의의와 가치를 무너뜨리는 결과였다. 그렇다고 나머지 배우들과 잘 섞이는가? 그것도 아니다. 남배들의 피지컬은 너무너무 크고 김리안 배우는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 보이고, 노래를 다 같이 부르는 장면에서는 김리안 배우의 목소리가 너무 튄다.(김리안 배우가 못한 건 아니었다. 너무 이질적이라 아쉬웠을 뿐!)

연극 <어나더 컨트리> 공연 사진.(출처 : 어나더 컨트리 트위터 공식 계정)

전형적인 이미지일지라도

여배우의 설자리가 늘어날 수 있다면

환영해야 할까?


하지만 공연을 보면서 워튼이 나올 때마다 불편했던 마음과 함께 고민도 생겼다. 제목에 물음표를 달아놓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쨌든 여배우의 설자리가 무척이나 없는 한국 공연계에서 이가 조금이라도 늘어날 수 있다면 약간의 아쉬움은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현실적으로 여배우들은 실력도 있고 시간도 있는데 공연할 기회 자체가 없어서 문제인 상황이니까.

물론 필자의 생각은 현실적인 쪽보다 이상적인 쪽이다.(사실 당사자가 아니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싶다. 나는 기회 하나하나가 고픈 배우가 아니니까.) 이왕 젠더 프리를 하는 거라면 젠더 프리가 가지는 현시대에 가지는 긍정적 의의, 다시 말해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쌓아둔 '여성성'을 무너뜨리는 것에 맞춰서 캐스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나더 컨트리>도 모든 배우를 여자로 캐스팅해버리든가, 아니면 설정상 도저히 어렵다고 여겨지면 일부 인물들만 하거나 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와 별개로 <어나더 컨트리> 극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그래서 이번 캐스팅이 더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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