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공연들에서 여캐들은 남캐들을 위해 자신들의 이야기 없이 그저 소비된다. 특히나 시간적 배경이 과거일 때나, 실존인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때는 더욱. 시간적 배경이 과거일 때는 여성 혐오가 지배적이었고 여성들의 입지가 좁았던 과거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여신님이 보고 계셔> 같은.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때는 그들의 실제 삶이 남긴 궤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이 경우의 예시는 <라흐마니노프>를 들 수 있겠다.
그래서 <시데레우스>를 보러 가게 됐을 때 큰 기대는 없었다. 시데레우스에 나오는 마리아는 실존 인물인 데다가 공연이 아주 머나먼 과거, 16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 공연이 갈릴레오와 케플러라는 인물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와 그를 통해 얻어낸 진실을 중심적으로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으니 더더욱.
하지만 공연을 막상 보고 나와서는 마리아가 마음속에 더 강렬하게 남았다. 마리아는 이 공연의 화자로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진리와 강요되는 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평범한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가,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도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공연은 마리아 첼레스테가 종교재판을 받으러 떠난 아버지 갈릴레오의 집으로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갈릴레오는 마리아에게 케플러와 함께 주고받은 편지를 태워달라고 부탁하고, 마리아는 태우기 전에 남겨진 편지를 하나하나 읽어보며 자신이 몰랐던 갈릴레오의 이야기에 대해서 알게 된다.
즉, 공연은 마리아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마리아를 화자로 삼은 건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야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든다. 왜냐, 마리아의 직업은 수녀니까.
수녀라는, 즉, 성서의 진리를 믿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으로서 갈릴레오와 케플러는 무덤에 꽃 한 송이 올려주지 않아야 할 이단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진실에 대한 진심을 읽은 그녀는 자신의 믿음을 두고 고민한다. 이단의 딸이 된다는 사실이 마리아에게 얼룩을 남길 수도 있기 때문에 때로는 불안정하고 흔들리지만, 결국 단호하게 진실을 찾을 것이라 결심하고 진실의 흔적을 좇는다.
<시데레우스> 초연 공연 사진 및 대사 (출처: https://m.stagetalk.co.kr/Column/Detail/70863?ExpertType=1)
그런 그녀의 모습은 당시 발견되는, 믿음과 다른 진실들을 받아들였어야 할 개인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는 연구를 시작하기 전 갈릴레오의 모습도 보이고, 어떤 면에서는 연구 마지막 즈음의 케플러도 보이며, 어떤 면에서는 끊임없이 가치관의 충돌을 일상생활처럼 겪고 있는 우리가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마리아는 갈릴레오이자 케플러이자 우리다. 이처럼 한 여성 캐릭터가 '일반 사람'을 상징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우리는 늘, 남성이 '일반인'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왔으므로.
게다가 마리아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실제로 마리아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갈릴레오의 동거인과 갈릴레오 사이에서 난 첫째 딸이었는데, 정식으로 결혼한 관계에서 나온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적당한' 혼처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마리아 첼레스테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바로, 수녀가 되는 것. 그래서 그녀는 수녀원으로 가 마리아 첼레스테라는 세례명을 얻고 수녀로 평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극중에서는 자신의 믿음과 아버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편지를 태우지 않고 읽고, 종교 재판에서 갈릴레오를 구하기 위한 편지를 쓴다. 수녀원에 가기로 한 것도 그녀 스스로 한 결정인 듯한 대사가 나오기까지 한다.
<시데레우스> 공연 사진 및 대사 (출처: https://m.stagetalk.co.kr/Column/Detail/70863?ExpertType=1)
고증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창작진의 선택, 하지만 때로는 과감함도 필요하다
사실 <시데레우스>의 고증 자체는 엉망징창(...)이다.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편지를 나눈 건 맞지만, 그게 지동설의 본격적인 연구를 다루고 있다거나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라는 책의 기반이 되지는 않았다. 각자 망원경을 발명한 건 맞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고. 마리아 첼레스테의 경우에는 더 하다. 위에서 말했듯 수녀원에 가려는 결정은 마리아가 결정한 게 아니었고, 극 중에서는 마리아가 수녀원에 들어가면서 갈릴레오와 손절(...)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 마리아는 갈릴레오에게 애정을 가지고 수녀원에 들어가서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느끼는 것은 고증이 뭐가 대체 그렇게 중요하냐는 것이다.고증과 조금(혹은 많이) 다르더라도 불편한 요소를 제거하는 게 그리고 현재의 가치에 맞추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소소한 혹은 전면적인 수정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과거의 이야기가 가지는 교훈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오늘 소개한 <시데레우스>처럼. 사실 관객들은 지금까지 과거의 이야기에 있는 불편한 요소들을 그 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수해 왔다. 만약 이런 부분이 수정된다면? 관객들은 쌍수 들고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의 기준으로 봤을 때 정말 심각한, 여캐의 설정을 바꿨는데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너무너무 많이 해친다면? 나는 차라리 그 공연을 올리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건 21세기지 과거가 아니니까.)
그래서 <시데레우스>가 참 좋았다.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마리아에게 스토리텔러이자 개인이자 일반사람으로의 역할을 부여해 공연 안에서 핵심적인 역할로 만들어서. 이런 여성 화자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그 외, <시데레우스> 영업하기
내용 넘버 무대 조명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맛집
위의 글에선 마리아의 이야기에만 집중했지만, 사실 <시데레우스>는 영업할만한 요소가 참 많다. 일단 내용이 좋다. 고증은 안 맞지만(...)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진실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단순히 억압적 상황-극복 이런 서사가 아니라 개인의 성장 서사와도 맞물려있다. 현실에 지쳐 하고 싶은 일을 잊고 살았던 갈릴레오에게 찾아온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케플러. 자신의 꿈을 되새기며 변해가는 갈릴레오와 세상에 물들어가는 케플러. 너무나 일반적인 이야기 아닌가. 그래서 머나먼 과거의 천문학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어려운 수학공식이 나오고, 별들의 이야기를 해도 낯설게 느껴지진 않는다. 넘버는 말할 것도 없고.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넘버이자 관객석에서 듣고 있으면 관객들까지 벅차게 만드는 넘버 '살아나' 영상을 첨부한다.
그리고 무대와 조명이 예쁘다. 진짜 정말 아주 완전, 예쁘다. 조명 맛집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2층에서 공연을 보면서 조명으로 황홀함을 느끼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1층에서만 보다가 2층에서 봤던 날, 내가 공연을 지금까지 반만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시데레우스> 무대 사진(출처 : 주식회사 랑 트위터 공식 계정)
그래서 또 한 번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다. 물론 공연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안다. 공연을 보러 가는 길에 이용하는 대중교통도 아무래도 무섭고. 공연장은 필연적으로 다중시설일 수밖에 없고. 배우는 마스크를 쓸 수 없으니까. 하지만 공연장만큼 방역을 철저히 하는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큐알 체크인이나 입장 명부를 쓰고, 체온 체크를 필수적으로 해야 공연장이 있는 건물 자체로 입장할 수 있다. 더불어 주기적으로 공연장 시설을 소독하고 있고, 신분증까지 확인한 후에 관객들을 입장시킨다. 또한 관객들은 마스크를 써야만 공연을 볼 수 있으며, 지금은 비말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환호성도 물 섭취도 금지된 상황이다.
많은 이들의 생계가 달린 만큼 공연계는 아주 철저히 방역 중이다. 그래도 상황상 보기 어렵거나 코로나 감염이 우려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주 혹시나, 혹시나 공연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