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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서사가 만들어낸 나비효과, 뮤지컬 <비스티>

내용 노래 연기 그 무엇 하나 설득력이 없다

by 한성

(※글의 특성상 뮤지컬 <비스티>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또한 글의 내용 안에 뮤지컬 <비스티>에 대한 비판과 배우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둥글게 하려고 했으나 보는 이에 따라 꽤나 신랄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 주의하고 읽어주세요.)

(※중간중간 삽입되어있는 사진은 글에서 말하고 있는 배우와 상관없이 임의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뮤지컬 <비스티> 포스터. (출처 : 뮤지컬 <비스티> 트위터 공식 계정).

뮤지컬 <비스티>를 보고 왔다. 연뮤덕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비스티>가 돌아오는 것에 대해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다. 호스트바와 선수라는 <비스티>의 소재와 실제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남자'배우들의 대사 속에서만 성격이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지원이' 캐릭터가 문제적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 글에서 할 이야기는 호스트바와 선수라는 <비스티>의 소재가 아니다. 이 공연은 선수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쓰레기 양아치'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기도 하고, 자칫 동정심이 들 수 있지만 이를 막기 위해 여러 디테일을 설정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지원이 이야기는 2편에서 할 예정이다.(할 말이 많아서...)(....)

이쯤 되면 <비스티>를 비판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빼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올해 공연되고 있는 <비스티>의, 눈에 두드러지는 가장 큰 문제는 텅 비어버린 서사에 배우의 자유도가 몹시 높을 경우 생기는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우의 '자유로운' 해석이

오히려 서사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필자가 과거에 봤던 2016년 <비스티>의 경우에도 서사는 텅텅 비어있었다. 사실상 기본적인 설정만 있는 상태랄까. 예를 들자면 공연 안에서 마담과 주노, 알렉스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알렉스는 싱글대디다, 마담의 와이프인 지원이는 주노의 첫사랑이었지만 헤어졌다. 이 세 가지 정보가 나오는데 세 사람이 어떻게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지나 알렉스가 왜 싱글대디가 되었는지, 지원이와 주노가 왜 헤어졌었는지 이런 건 공연 안에 나오지 않는다. 이건 배우들이 채워야 할 몫이었다.

뮤지컬 <비스티>의 마담(재현) 역 공연 사진. (출처 : 뮤지컬 <비스티> 트위터 공식 계정)

<비스티>의 중심 캐릭터이자 나머지 캐릭터의 서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마담' 캐릭터는 더하다. 마담의 설정도 공연 안에서는 호스트바 개츠비를 이끄는 인물이자 주노의 첫사랑인 지원이와 결혼했으며, 나머지 선수들이 개츠비를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인물이라는 것 정도만 있다. 개츠비를 어떻게 그리고 왜 이끌게 되었는지, 주노의 첫사랑인 지원이와는 왜 결혼하게 되었는지, 왜 선수들이 개츠비를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다 배우가 '디테일'로 관객들에게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배우가 설정한 노선 때문에 앞 뒤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특정 배우가 표현하는 마담은 (겉으로 보기에는) 젠틀하면서도 유한 모습을 보이는데, 대본상 민혁이가 호스트바를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마담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서다. 대사로 '마담이 X같이 굴어서 드라마 계약건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근데 공연을 보고 있으면 마담이 대체 뭘 그렇게 X같이 굴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관객들이 모르는 서사가 있나 싶지만 왜 그걸 관객들이 상상해야 하지 싶다.

마담과 민혁이의 서사가 이해되지 않으면 가뜩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비스티의 내용은 더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비스티의 결말에 민혁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민혁이를 다치게 하는 마담을, 꿈을 잃은 민혁이가 마담을 찌르는 마지막까지. 특정 배우의 마담에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뮤지컬 <비스티> 민혁 역의 공연 사진. (출처 : 뮤지컬 <비스티> 트위터 공식 계정)

1인극이 아닌, 5인극의 <비스티>


하지만 배우의 자유도가 몹시 높은 덕분에(?) 다른 배우의 마담에서는 민혁이 서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같이 있고 싶지 않은, 넌더리 나는 인물(...)로 표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 배우의 마담이 나오는 날에는 이 배우만 눈에 확 두드러지는 상태였다. 주의, 안타깝게도 이 말은 이 배우에 대한 칭찬이 아니다. <비스티>는 1인극이 아니니까.

이 배우가 표현하고자 하는 마담은 아주 거칠다. 유리병을 들고 테이블을 쾅쾅 두드리기도 하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 뛰다가 눕기도 하고 민혁이를 다치게 할 때 눈을 칼로 찌르기도(....) 한다.(다른 배우는 눈을 찌르지 않고 볼을 칼로 가른다.) 모든 표현이 센 마담의 옆에서, '쓰레기 양아치'인 민혁이는 갑자기 온순해 보이고(....) 무덤덤하고 느긋한 노선의 주노는 급기야 연기를 안 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가 잘못했다고 말하기에는 좀 애매한 부분이 있다. 나름대로의 노선과 디테일을 확실히 구축하고 '열심히' 아주 '열심히' 연기하는 것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 비스티는 5인극이고, 마담이 어떤 노선을 타느냐에 따라서 다른 인물들을 이해하는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이 배우가 노선과 디테일의 세기를 죽이든, 아니면 다른 배우들이 이에 맞춰서 세게 연기하든 어느 쪽이든 이뤄져야 한다.

이런 문제를 정리할 사람은 결국 연출이다. <비스티>는 기본적인 내용을 전달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노선과 디테일을 정리하고 배우들끼리 조화로울 수 있도록 조언을 던질 사람이 시급히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비스티>는 연출의 역할이 아주아주 최소화(...)(좋게 말해서 최소화지 그냥 아무것도 안 한다.)되어 있어서, 공연이 끝날 때까지 이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사실 지금도 공연 2주밖에 안 남았는데 이런 상황인데 뭘 바라겠는가.(....))


서사가 부족하면 배우의 역량이 중요해진다,

하지만....


뮤지컬 <비스티> 무대 배경 사진. (출처 : 뮤지컬 <비스티> 트위터 공식 계정)

서사가 비어있으면 배우가 이를 채워야하기 때문에 배우의 역량이 중요해진다. 게다가 사람들이 서사를 이해하느라 필요한 시간을 배우들의 노래나 연기를 지켜보는 시간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노래와 연기가 아쉬우면 눈에 확 띄게 된다. 이번에 공연을 보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필자가 본 7명의 배우 중에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연기가 아쉽든 노래가 아쉽든 아니면 둘 다 아쉬운 상태였다. 지어 다른 공연에서 노래와 연기가 아쉽지 않았던 배우도(!) 이건 습량이 부족해서 오는 문제다.

위에서 말한 노선이 부조화를 이루는 현상도 사실 연습량 부족에서 온 것이다. 연습을 많이 해서 합을 맞춰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니 누군가 다른 배우들과 섞이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그리고 연습이 부족하면 제일 먼저 티가 나는, 배우들의 떼창에서의 불협화음은 필자를 경악하게 만들 정도였다. <비스티>의 대표적인 넘버인 '아름다운 밤이여'에서 어떤 배우의 목소리는 크게 들리고 어떤 배우의 목소리는 작게 들리는, 쿠당탕와장창의 상태였다.(...) 음도 묘하게 안 맞고 음을 끊는 타이밍도 다 같이 애매하고, 각자 한 음으로 고정되어 힘껏 지르는 타이밍에서만 화음이 좋았다.


배우가 채울 수 없을 만큼 비어버린 서사,

내용 이해에 한 줄기 빛 같았던 대사는 모두 어디에


하지만 배우의 노선도 디테일도 연출도 최악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번 <비스티>가 가장 최악인 점을 얘기하자면, 서사가 비어도 너무 비어버렸다는 것이다. 저번 시즌에서 그나마 인물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던 대사들이 빠지면서 쟤 왜 저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원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할 것이고, 여기서는 승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승우는 개츠비를 전복시키는 인물이고, 이를 위해 마담과 주노 알렉스 민혁이 모두에게 '공사'를 친다. 그런데 여기서 승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승우는 대체 왜 저러는가.

뮤지컬 <비스티> 승우 역의 공연 사진. (출처 : 뮤지컬 <비스티> 트위터 공식 계정)

배우들 나름대로 디테일을 채워 넣으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그래도 부족했다. 승우가 마담에게서 벗어나고자 개츠비 전체를 뒤집어엎어버리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사실이 암시되는 장면(심지어 여기도 대놓고 나오는 게 아니라 암시되어있다)에서, 승우는 대체 무슨 깡으로(....) 저걸 기획하는지가 알 수가 없다.

이 시점에서 승우에게 주어져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다. 마담이 개츠비 선수들을 떠나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마담-주노-지원 사이의 관계 정도. 그런데 마담한테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주노를 도발하고, 패기 넘치게 주노한테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자기도 못 떠나고 있는 주제에.(....)

그리고 필자가 본 승우 역의 배우가 표현하는 노선 중에 좀 더 개츠비를 이끌며 가질 수 있는 돈과 관력에 대해 홀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이 경우에는 그전에 마담이 에이스는 너라 그러고 빚도 깎아주겠다고 하면서 전폭적인 지지를 주려고 하는데 대체 왜 마담을 배신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승우의 '공사'는 지원이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원이 서사가 통으로 날아가면서 + 관련 대사가 빠지면서 승우는 누군가의 도움도 없이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쿵짝쿵짝하다가 개츠비를 먹는 데 성공한다(...)


올라와서는 안 될 상태로 올라와버린 공연

관객의 이해심에도 상상력에도 한계가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비스티>를 두고 이 공연이 다시 와도 괜찮은가 아닌가에 의견이 다양했다. 필자는 좀 후자에 가까웠다. 2016년에 <비스티>를 꽤 여러 번 봤고 지원이 이야기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거라면 그냥 안 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비스티>는 공연 자체가 올라와서는 안 될 상태로 올라왔다는 게 제일 큰 문제다. 제대로 된 서사도 연출도 없는 상태에서 가장 기본적인 줄거리도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 되고, 결국 인물 5명 중에 누구 하나 제대로 이해되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배우들의 역량도 연습량도 부족해 무대 위 연기도 노래도 어설픈 상황이다.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게 무조건 욕먹을 일은 아니다. 필자도 배우들이 자유롭게 노선을 설정하는 공연에서 재미를 더 느끼는 편이고, 애초에 <비스티>의 매력은 여기서 기인하기도 했다. 어떤 마담을 보러 가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공연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기본이 깔려있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풀어줘야지 그것도 없이 이번 시즌의 커어어다랗고 휑한 무대처럼(...) 텅 비어있는 상태에서 배우들을 완전히 풀어놓으니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비스티>는 흥하고 있다. 예매도 어렵고 양도 구하기도 어렵다.(물론 이건 매크로의 문제도 있는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지만 이건 공연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배우들이 고군분투하며 남겨놓은 디테일에다 관객들이 살을 붙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이 내용을 착즙해서 끌어내는 공연이 얼마나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의 비스티는 배우들에게, 관객들에게 오로지 의지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연출과 창작진에게 정신차리라고, 지금 직무유기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공연을 살릴 수 있는 건 배우들의 많은 고민과 연습뿐임에도 이가 부족한 게 티가 나는 배우들에게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노래 연습과 연기 연습을 하는 게 배우의 기본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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