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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캐릭터의 불편한 설정 '제거'만이 답은 아니다

<비스티> 후기 2, 꽃뱀이 사라지자 남남 관계에 희생되는 여캐만 남았다

by 한성

뮤지컬 <비스티>가 끝났다. 이 작품에 나오는 지원이 캐릭터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미 끝나버린 공연의 이야기를 하는 게 맞을까 싶지만... 또 올지도 모르니까.

이제부터 구구절절 설명할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자면, <비스티>에 등장하는 '지원이'라는 여자 캐릭터가 수정되야하는 건 맞지만 올해와 같은 방식으로 수정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것이다. 꽃뱀 캐릭터인 지원이를 꽃뱀으로 남겨뒀어야, <비스티>의 서사도 (그나마) 온전할 수 있었고 여자 캐릭터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나마) 나은 방식일 수 있었다. 만약에 <비스티>의 큰 틀을 망치지 않고 지원이의 설정을 수정할 자신이 없었다면? 차라리 이 공연 자체를 안 올렸어야 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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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재현 역의 김종구, 주노 역의 정민 (출처 : 뮤지컬 <비스티> 공식 계정)

<비스티>에서 '지원이'는 재현(마담)의 부인이자 주노의 첫사랑이다. 순서대로 쓰자면 주노의 첫사랑이자 마담의 부인. 주노가 어렸을 때 지원이를 만나 서로 사랑했다가, 가난 때문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게 된 경우다. 마담의 부인이 되기 전에 만났는지 된 후에 만났는지는 불분명.(이 부분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기억나는 대사와 가사를 생각했을 땐 불분명한 것 같긴 한데... 혹시 선후관계가 극 중에서 나온다면 알려주시길.) 어쨌든 결론은 지금 주노와 지원이는 불륜관계라는 것.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지원이가 '꽃뱀'이라는 것이다. 주노에게 소위 말하는 '공사'를 치기 위해 접근한 인물이다. 과거까지는 그랬다. 마지막 즈음에 마담과 주노의 대화에서 관련 대사가 나왔다.

관련 대사가 나왔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위에서 설명한 지원이의 이야기는 모두, 100%, 하나도 빠짐없이 공연 캐릭터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지원이가 마담의 부인인 것도, 주노의 첫사랑인 것도, 심지어 꽃뱀인 것도 전부. 지원이와 주노의 듀엣 넘버가 있지만 여기서도 지원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2016년에는 실루엣으로, 올해는 실루엣도 빠지고 그냥 노래만 나왔다.

하지만 지원이는 <비스티>의 서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마담과 주노가 갈등을 빚게 되는 아주아주 큰 원인이고, 마담과 주노의 갈등은 <비스티> 이야기에서 한 70% 정도를 차지하니까.

그래서 <비스티>가 문제작으로, 돌아와서는 안 될 공연으로 꼽히는 데는 지원이 캐릭터가 가장 핵심적인 이유였다. 지원이 이야기를 지원이가 직접 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고 남자 캐릭터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이 되고, 게다가 그 입을 통해 전달되는 지원이의 정체는 꽃뱀이다. 또한 서사 진행을 위해 여자 캐릭터를 도구적으로만 사용한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것. 마담이 지원이를 마담이 심하게 때려서 마담의 옷이나 손에 피가 잔뜩 묻어있는 장면이 나온다.


무책임한 대사 삭제,

서사를 또(!) 망치고 여캐 활용을 더 최악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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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주노 역의 박규원, 재현 역의 정동화 (출처 : 뮤지컬 <비스티> 공식 계정)

이런 비판을 인지했는지 올해는 지원이의 이야기가 수정되었다. 그런데, 수정의 수준을 넘어서서 그냥 댕겅 잘라서 날아가버렸다(...) 지원이가 꽃뱀이었다는 내용이 사라지고, 공연의 마지막에 지원이가 '공사'를 쳐서 얻어낸 돈이 서사를 진행하는데 유용하게 쓰이게 되는 부분에 대한 설명도 사라졌다. 그래서 저번 비스티 후기 1편에서 말했던 것처럼, 또(!) 서사가 어그러져버렸다. 갑자기 어디선가 돈이 뿅 하고 등장해서 서사를 진행시킨다. 공연을 본 사람들은 물음표를 잔뜩 띄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원이가 꽃뱀이었다는 내용이 사라져 버리면서, 마담이 주노를 위해 지원이와 결혼하는 이유가 오묘(....)해져 버렸다. 이전까지는 주노에게 사기를 치려는 지원이를 막기 위해, 그리고 첫사랑으로부터 주노가 상처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혼한다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런 게 날아갔다. 쉽게 말하자면 마담이 주노 집착남(...)이 돼버렸다. 주노가 지원이가 함께 자기 옆을 떠나지 않도록, 즉 주노를 자기 옆에 붙잡아 놓으려고 마담은 지원이와 결혼했다. 마담 대사 중에 네가 그렇게 찾아대면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아, 뭐 이런 식의 대사가 나오는데 이 대사의 의미가 너무나 섬뜩해져 버렸다. 나와 주노 사이를 방해하는 사람을 제거해버렸다는 의미가 되어 버려서.

게다가 지원이가 꽃뱀이 아니면 지원이의 삶은 더욱 비참해진다. 지원이는 주노와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는데, 마담에 의해 결혼당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마담한테 심하게 폭력을 당한 뒤에 살해될 위기까지 처한다. 차라리 꽃뱀인 게 더 주체적인 캐릭터로 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되게 신기했다. 공연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지원이가 꽃뱀으로 그려지는 게 너무나 걱정됐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서는 지원이가 꽃뱀인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중간쯤에 마담 역의 한 배우는 지원이를 꽃뱀으로 가리키는 대사를 추가했다. 그래도 겨우 한 순간의 대사로 자첫러들을 다 이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한 배우는 끝까지 대사를 추가하지 않았다. 물론 마담이 주노에게 집착할 수 있다. 배우도 주노 집착 노선을 표현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러면서 잃게 되는, 안 그래도 설득력 없던 서사와 마담의 집착에 의해 희생되어버리는 지원이 캐릭터는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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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계속해서 달라지고 있다. 관객들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 공연계에서 이런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뭐, 물론 여전히 변화를 무시하고 과거의 모습에 머물러 있는 공연계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과거의 공연들이 이것저것 많이 수정되어서 오는 걸 보면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가 많다.

그러나 공연의 퀄리티에 상관없이 댕겅댕겅 잘라오는 식의 수정은 곤란하다. 이런 수정이 제일 빠른 길이고, 제일 편한 길이겠지만 공연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면 또 다른 측면에서의 직무유기다. 이번 <비스티>에서는 서사에 있어서 창작진의 직무유기가 이곳저곳에서 발생했는데 지원이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올해 이와 관련해서 수많은 비판을 받은 만큼, 다음 번에 올라올 때는(올라오게 된다면) 많은 개선을 해서 돌아오길 바란다. 만약 그럴 자신이 없다면? 과거에 함께 해서 즐거웠고 이제 다시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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