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공식 포스터. (출처 : 정동극장 공식 홈페이지)(※글의 특성상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를 보러 다녀왔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내게 기대작이었다. 2018년 초연으로 왔을 때 휴덕 시기라, 이 공연이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었던 터라. 이 공연이 올해 올라온다고 했을 때 배우 10명이 나오는데, 모두 여자인 그런 공연을 몰랐다니. 하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프리뷰 기간에 공연을 보고 딱 나왔을 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공연장을 나섰다. 선뜻 이 공연에 대해 후기를 쓰기가 어려웠고 결국 한 번 더 보고 나서야 지금 이렇게 후기를 쓰고 있다.
한 줄 요약,
하기 어려운 공연. 여성을 향한 억압, 그리고 여성의 자유에 대해 곱씹어보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공연(!)
‘여자의 적은 여자’?
장례식에 참석한 베르나르다 알바와 그의 딸들. (출처 :https://news.zum.com/photo/60125893/65682256#001)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1930년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스페인은 엄격한 가톨릭 문화 아래 가부장적이면서도 더 나아가 여성 혐오적인 인식이 지배적인 나라였다. 이 작품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안달루시아도 그러하다. 그리고 베르나르다 알바는 자신의 집에서 딸 5명을 억압하는 것을 진두지휘한다. 하지만, 억압 아래 자유를 향한 욕망이 꿈틀대지 않을 리 없다.
베르나르다의 남편 안토니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베르나르다는 그의 장례식날 8년상을 치르겠다고 선언하며 5명의 딸을 집안에 사실상 ‘가둔다.’ 하지만 첫째 딸 앙구스티아스에게 뻬뻬라는 남자가 다가오고, 베르나르다도 이를 용인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이 가까워지는 듯 보이지만 넷째 딸인 마르띠리오와 다섯째 딸인 아델라에게도 뻬뻬가 특별해지기 시작하면서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파국의 일보직전으로 향한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앙구스티아스(김려원). (출처 : 정동극장 공식 트위터 계정) 줄거리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극의(그리고 원작 소설의) 내용은 상당히 발칙하다. 어떻게 보면, 첫째 언니의 남자를 두 동생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니까. 마르띠리오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라도 하지, 아델라는 뻬뻬랑 직접적으로 관계를 가지기도 한다. 앙구스티아스와 뻬뻬가 결혼하게 내버려 두고 자신이 뻬뻬의 ‘정부’가 되겠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마르띠리오(전성민). (출처 : 정동극장 공식 트위터 계정) 그렇다고 해서 아델라보다 마르띠리오가 이해할만한 건 아니다. 아델라의 마지막에, 마르띠리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마르띠리오의, 거칠게 말하자면 ‘고자질’과 ‘거짓말’이 아델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래 놓고 한다는 말이 가관이다. "한 번이라도 그를 가졌으니 행복했을 거라고."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아델라(김히어라). (출처 : 정동극장 공식 트위터 계정) 무대에서 펼쳐지는 앙구스티아스, 아델라, 마르띠리오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왜, 내가 여자들끼리 지금 서로 배신하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야기를 보고 있어야 하는 거지? 지금처럼 여성끼리 연대하는 이야기가 많은 이 시대에. 왜? 결국 이 공연을 보고 나면 머릿속에 가장 강하게 남는 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이 문구라는 게 너무 의아했다.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이 공연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다른 곳에 있다. 바로, 뻬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말한 마르띠리오에게 아델라가 해주는 말.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야.’
아델라(김히어라)가 마르띠리오(김국희)에게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장면.(출처 : http://www.xportsnews.com/article/1381103) 아델라가 앙구스티아스의 남자 뻬뻬와 밀회를 가지는 것에도, 마르띠리오가 아델라를 질투하는 것에도, 사실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두 사람에게 진정한 자유가 없었다는 것.
아델라는 5명의 딸 중 가장 아름답지만 집 안에 갇혀있는 처지다. 8년 동안 나갈 수 없으니 만날 수 있는 건 앙구스티아스를 찾아오는 뻬뻬뿐이다.(게다가 뻬뻬는 매력적이다.) 마르띠리오는 엔리께라는 남자와 결혼할 뻔했지만, 베르나르다의 반대와 뒷 공작(?)으로 결혼하지 못했다. 심지어 베르나르다가 엔리께를 돌려보냈다는 걸 알지 못해, 엔리께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아델라와 마르띠리오가 인생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억눌러져 있던 감정은 결국 아델라에게는 밀회로 마르띠리오에게는 질투로 터져 나온 것이다.
나머지 인물에게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다.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적으로 대하는 모습은 결국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약 창문을 통해서 겨우 보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북쪽에서 오는 일꾼들과 만날 수 있었다면? 그들에게 애인과 대화할 시간이 어두운 밤 몇 십 분에 불과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삶의 모습은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이 공연은 자유를 빼앗기고 서로를 적으로 여기도록 '만들어진' 이들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는 공연이다. 극 중에서는 이건 딸들의 잘못이 아니며, '베르나르다 알바'와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으로 상징되는 스페인과 스페인의 가부장적 문화의 잘못이라고.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베르나르다 알바. (출처 : 정동극장 공식 트위터 계정) 그리고 <베르나르다 알바> 속 여성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또 다른 여성들에게, 당신들도 잘못한 게 없으며 여성 혐오와 성차별적인 문화가 문제라고. 그렇다면 자, 그럼 대체 이 공연이 왜, 지금 의미가 있는가? 특히나 한국에서. 지금은 2021년이고, 한국에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처럼 극단적인 '여성 억압'의 사례는 없지 않은가.
여성을 향한 억압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그런데, 정말 없을까? 우선 다소 '가벼운' 억압부터 시작해보자. "여자로 태어난 이상 외모 관리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당장 두 달 전 내가 나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이다. 취업 준비생인 나에게 면접에서 '좋게' 보여야 한다면서. 그런데 나는 의문이 들었다. 남자들은 면접에서 잘 보이기 위해 쌍꺼풀을 하고 코를 세우고 주사를 맞아보자는, 이런 제안을 받을까? 나는 왜 실력이 아니라 외모를 준비해야 하는 걸까?
이제 '무거운' 억압으로 가보자. 지금도 우리나라의 어딘가에서는 여성을 향한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 이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얼마 전 두 건이나 있었다. 우리나라의 수도를 이끌었던 수장이 뒤에서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인권위 조사 결과 밝혀졌고, 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요구하던 한 정당의 대표도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돼 당대표직에서 사퇴했다.
극단적이라고 이야기했던, 뮤지컬 속 여성 억압의 모습이 우리 주변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기도 하다. 극 중에서 베르나르다의 남편인 안토니오가 자신의 의붓딸 앙구스티아스를 성폭행했다고 언급되는데, 지난 5년간(2016년-2020년 10월)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친족 간 성범죄는 총 2570건이었다. 성차별과 여성 억압의 현실에 대한 통계를 인용하자면 끝도 없다.
그러니, 여러분. 혹시 <베르나르다 알바>를 보셨다면. 그리고 제가 느꼈던 첫 후기를 가지고 계시다면 한 번쯤 더 곱씹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공연이 물론 10명의 '여'배우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뻬뻬라는 남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여성들이 끝끝내 서로 연대하지 않고 갈등을 빚는다는 점에서 너무나 아쉬울 거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여성 간의 갈등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고 좋은 극이에요. 정말, 진심으로요.(갑자기 존댓말을 쓸 만큼 진심이에요.;;ㅇ;;)
그렇지만 이 공연에 한계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뻬뻬 중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공연 창작진에게 다소 아쉬운 점이 있는데, 이건 2편에서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