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연뮤계에서 중계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가면서 공연이 대부분 중단 혹은 취소되었고, 여러 제작사가 많은 극들의 중계를 시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공연을 제대로 느끼려면, 그리고 제대로 평가하려면 현장에 꼭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계하는 공연에 대해서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은 얼마 전 중계를 통해 본 한 공연에 대해 너무 화가 났기 때문이고, 현장에 가서 보더라도 화가 난 포인트가 불변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오늘 분노의 후기를 남겨볼 공연은 뮤지컬<라 루미에르>(La Lumiére')다.
(※뮤지컬 <라 루미에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뮤지컬 <라 루미에르> 공식 포스터. (출처 : Yes24 공연 예매 페이지)
우정을 쌓기에는 너네, 너무 서로 적 아니니?
공연 제목의 알파벳에서 느낀 독자들도 있겠지만, 이 공연의 제목은 프랑스어(뜻은 '빛'이라는 의미)다. 공연의 배경도 프랑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점령당한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18세 소녀 소피와 소년 한스가 만나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사실 전쟁과 우정은 드라마, 영화, 공연 등에서 많이 쓰이는 소재 중 하나다. 공연의 경우 제일 대표적인 사례가 <여신님이 보고 계셔>.
뮤지컬 <라 루미에르> 공연 사진.(출처 : <라 루미에르> 제작사 벨라뮤즈 공식 트위터 계정)
그런데 중요한 건, <라 루미에르>에서 소피와 한스는 서로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 적이라는 것이다.소피는 레지스탕스, 한스는 한 분대의 분대장이다. 게다가 소피는 독일군에 의해 가족을 잃는다.(공연 상에서 감옥에서 일주일 전?쯤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면 소피와 한스 모두 전쟁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끌려왔다거나 전쟁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갖고 있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어려서 전쟁에 무지하다거나, 그런 내용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게 없다. 심지어 한스는 전쟁에 진심이다(...)그는 공연 제일 처음에 총검술을 연마(?)하고, 독일군의 목표에 대해 주저없이 말하며, 상관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소피는 잔 다르크같은 인물이 되겠다며 프랑스 국기를 휘두르고,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생각을 확실히 가진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친구가 된다? 공연을 보면서 몹시 당황했다. 게다가 친구가 될 만한 그런 사건도 딱히 없다. 한스가 약간 꺼벙(...)한 인물로 나오는데, 그림에 미쳐서는(?) 레지스탕스가 숨어있는 지하창고에 모네 그림이 있다는 이유로 매일 밤마다 드나든다. 소피 입장에선 뭔 이런 정신 나간 분대장이 다있나 싶었을 것이다. 근데 그러다가 갑자기 뚝딱뚝딱 시간이 흘러가더니 말을 놓고 친구가 된다. 보면서 '쟤네 왜 갑자기 친구됨...?' 이 생각뿐이었다.
순수하고 어리바리한 한스, 이렇게 그려도 될까?
뮤지컬 <라 루미에르> 공연 사진.(출처 : <라 루미에르> 제작사 벨라뮤즈 공식 트위터 계정)
그리고 제일 문제가 되는 인물이 바로 한스다. 위에서 잠깐 얘기했지만 한스는 약간 어리버리한 인물이다. 그림을 보겠다고 분대장이면서 적이 있는 지하창고에 오는 거 하며, 소피의 밤잠을 설치게 한 쥐를 살려달라며 자기의 목숨을 거는 거 하며, 뭐 하나 18살 분대장이라고 하기에는 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인다. 처음에는 이런 꺼벙한 한스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는데, 갈수록 한스를 이렇게 그려도 되나.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한 사람을 죽여서(총통을 죽여서) 전쟁을 끝내고 싶다고 말하는 소피에게 한스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근데, 그걸 독일군인 한스가? 한스는 자기는 사람들 죽인 적 없다며 그림만 그렸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근데, 그렇다고 한스의 죄가 사라질까? 한스가 그린 그림으로 인해 전쟁에 가담하게 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어떻게 하나? 심지어 한스는 '소피'에게 말한다. 잊지말자. 소피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걸. 독일로부터 프랑스가 점령당한 시점의 이야기니, 프랑스의 많은 이들이 독일군에 의해 사망했을 것이다. 이 때부터 한스를 그저 웃으면서 볼 수 없게 되기 시작했다.
순수하고, 어리바리하고,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독일군 분대장인 인물. 뭐랄까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모순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물론 독일군이라고 해서 태생부터 악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어왔지만 그러기엔 앞에서 말했듯 한스는 너무 전쟁에 진심이다(....)
게다가 이런 설정은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무례하다. 내가 만약에 독일군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스라는 인물이 이렇게 그려지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단 우리나라의 경우를 대입해본다면 순수하고 어리바리한 일본군.... 벌써부터 앞 뒤가 안 맞는 기분이다.
소피, 너 왜 레지스탕스로 설정된 거야?
뮤지컬 <라 루미에르> 공연 사진.(출처 : <라 루미에르> 제작사 벨라뮤즈 공식 트위터 계정)
게다가 한스와 소피가 어느새 (관객들 모르게) 친구를 먹었기 때문에 소피는 한스의 '인간적인 면'을 봐주는 사람이다.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그러기엔 얘네 둘, 서로 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전쟁에 나가 결국 사람을 죽이게 된 한스가 소피에게 찾아와 울면서 절규하자, 소피는 손을 잡고 나쁜 건 세상이라며 그를 위로해준다. 근데, 죽은 사람 프랑스 사람일 거 아닌가(....) 소피, 너 레지스탕스 아니었니?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아, 지금 생각만 해도 너무 피곤하다. 자, 또 우리나라를 대입해보면. 일본군 소년이 사람을 죽였다며 우는 걸 독립군 소녀가 위로하는 것이다. 아아아악, 진짜 최악이다.
사실 이 공연의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여기서 나오는데. 소피가 '레지스탕스'로 설정된 이유가 공연 내에서 없다는 것이다. 지하창고에 갇혀있으니 싸우지도 않고, 신념은 있는 것 같아보였는데 갑자기 한스랑 친구 먹더니 신념도 사라지고. 시놉시스에 보면 '잔 다르크 같은 장군이 되어 조국을 해방시키고 싶은'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 넘버에서만 그렇게 느껴지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게다가 자유를 맞이한 이후에도 한스가 없다는 이유로 '슬픈 자유'라고 이야기하기까지.
뮤지컬 <라 루미에르> 공연 사진.(출처 : <라 루미에르> 제작사 벨라뮤즈 공식 트위터 계정)
개인적으로는 이게 제일 실망스러운 부분이었다. 캐릭터 설정에 보면 레지스탕스에, 냉철하고, 이성적이고, 조국 해방을 꿈꾸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설정이라는 설정은 온통 다 들어가있다. 그런데 이런 게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일단 냉철하고 이성적이었으면 한스가 창고에 왔을 때 총으로 쏴야했다(...) 아니면 적어도 한스 앞에서 관등성명은 하지 말았어야지.
그래서, 성인지 감수성이 높고 주체적인 여성을 보고 싶어하는, 뮤지컬의 주 소비층인 여성 관객들을 타겟으로 이것저것 설정을 넣어놨는데 그걸 공연 내용에서는 전혀 활용하지 못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좀 더 거칠고 쉽게 말하자면 여캐코인 타려다가 역량이 부족해서 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아서 실패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다.
뮤지컬 <리지>를 다룬 글에서 이야기한 적 있지만, 이제 관객들은 여캐가 나온다고 와아아앜 하고 뛰어가서 봐주지 않는다. 물론 여캐의 비중이 커지는 것, 중요하다. 여자 배우들이 자신의 역량을 뽐낼 수 있는 자리가 별로 없으니까. 그런데 그게 불편한 내용이라면. 분량 내내 '빻은' 작품 아래서 고통받는다면? 글쎄,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필자는 공연 내용도, 그리고 창작진이 여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애초에 관객들도 소비자다. 좋은 공연이어야 그 공연을 보러갈 것 아닌가. <라 루미에르>는 여캐를 잘 다루냐 못다루냐를 넘어서서 내용이 별로다(....)
뮤지컬 <라 루미에르> 공연 사진.(출처 : <라 루미에르> 제작사 벨라뮤즈 공식 트위터 계정)
한스의 문제에 있어서도, 소피의 문제에 있어서도 작가가 전쟁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하고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게 너무 잘 보인다. 전쟁은 언제나 어려운 소재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전쟁에 참여한 것이 자발적인가 비자발적인가에 대해서도 논쟁의 여지가 다분하다. 그런데 이걸 그냥 툭툭 잘라서 장면 장면마다 넣고 제대로 마무리 없이 우정, 더 나아가 사랑. 짜잔? 게다가 우리나라의 전쟁 이야기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전쟁 이야기를?이건 너무나 무례하고 어설픈 일이다.
지금까지 비판만 했는데 놀랍게도 비판할 포인트가 더 있다. 다른 공연에서 쓰였던 소재들을 이리저리 가져왔지만 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가사가 너무 투박하고 직설적이라는 것. (나쁜 건 세상이야, 웃기지마, 꺼져, ... 뮤덕이 되기 전 사람의 말에 노래를 붙인 게 어색하게 들리는 그 경험을 오랜만에 다시 했다.)
그래도 좋은 점을 이야기하자면... 피아노로 진행되는 넘버가 참 좋았다. 근데 서사가 너무 별로고 가사가 너무 직설적이어서 그것마저도 공연 중반을 지나가면 흐려진다.(...)
어려운 시국에 퐁당당으로 올라오고 있는 몇 안 되는 공연인 <라 루미에르>에 대해서 제작사와 배우들에게 정말 진심어린,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도저히, 연출이자 작가에게만큼은 박수를 치기가 어렵다. 제발. 어려운 소재를 쓸 때는 많은, 정말 많은 고민과 심사숙고를 거치길 바란다. 무례한데다 어설프기까지 한 공연, 다시 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