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쓰릴미> 리뷰 3편
쓰릴미 리뷰 3편을 예고해놓고 글 쓰기를 미루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도 아주 많이 걸렸고, 글을 올리는 것 자체에 대해서 아주아주 많은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일 주요한 이유는 내 얼굴에 침뱉기 같아서. 내가 좋아했던 공연이 알고 보니 잘못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하는 거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해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뭐랄까...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은 고해성사에 가깝다.
쓰릴미의 대표적인 캐치프레이즈, '누가 누구를 조종했는가'에서 알 수 있듯이 쓰릴미는 '그'와 '나'의 주도권 다툼에 대한 이야기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겉보기에는 '그'가 '나'를 이끌어가는 것 같아보였지만 결국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내용을 공연 내내 풀어나간다. 하지만 여기서 '그'의 동기나 '나'의 동기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건 배우들의 몫이다. 배우들이 그 날 그 날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느냐에 따라서 매일 매일 공연에서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쓰릴미의 장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쓰릴미의 장점을 모두 차치하고, 결국엔 '그'와 '나'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일 뿐이다. 게다가 어린아이를 죽인 사람들. 이번 시즌에서 새삼 이 부분이 나에게 공연을 관람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단, 이전까지는 '공연'과 '실화'를 분리해서 볼 수가 있었다. '그'와 '나'의 역할적 특징(실화의 이름을 쓰지 않고 '그'와 '나'를 쓴 것, 그리고 인물을 해석하는데 배우의 자유도가 높은 것)이나 최소화된 세트 등이 이를 가능케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프롤로그에서도 밝혔지만 2017년 발생했던 인천 여중생살인사건이 쓰릴미와 너무도 유사했기 때문에. 반성이라고는 없었던 가해자들처럼 쓰릴미의 '그'와 '나'도 그러했다.(물론 이것도 배우마다 해석의 차이가 있지만 필자가 본 쓰릴미 배우들은 살인을 저질렀던 당시, 즉 어린 시절에는 죄책감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또한 실제로 그들이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를 반영하는 내용(리차드와 네이슨의 관계, 복종하는 사랑)에 거부감을 느꼈고, 어린아이를 죽인 이유에 누군가(배우들이)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번 글에서 말했던 대로 직관적인 연출이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연출은 굳이 숨기려하지 않았고 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 또한 그랬다. 내가 보러갔던 날, '그' 역할의 배우가 피묻은 쇠방망이를 들고 무대 앞을 돌아다니는 걸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무대에서 '비도덕'적인 내용을 펼쳐도 된다는 면죄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미투운동의 영향이 컸다. 미투운동 당시에 예술이라는 '고고한' 목적을 위해 희생당해온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부적절한 다른 소재, 주제들에 있어서도 예술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허락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꼭, 비도덕적인 내용을 담아야겠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자면 뮤지컬 <리지>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져도 오랜시간 학대를 받아온 리지의 서사가 등장하기 때문에 리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쓰릴미>에는 그런 게 없다. 그냥 실제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서 가져온 것일뿐.
물론 여전히 이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쓰릴미가 가진 장점(배우에 따라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과 쓰릴미의 넘버는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다. 이 작품에 진심이었다는 게. 이런 작품이 지금의 시기에 반복적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적절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이제, 무대에서 그만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