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 제91조, "채권변제의 특례"

by 법과의 만남
제91조(채권변제의 특례) ①청산 중의 법인은 변제기에 이르지 아니한 채권에 대하여도 변제할 수 있다.
②전항의 경우에는 조건있는 채권, 존속기간의 불확정한 채권 기타 가액의 불확정한 채권에 관하여는 법원이 선임한 감정인의 평가에 의하여 변제하여야 한다.


제91조는 '특례'라는 이름으로 규정되어 있는데요, 전조였던 제90조가 채권신고기간에는 변제를 금지하는 '제한'이었던 것과는 비교됩니다. 채찍을 줬으면 당근도 주어야겠다는 심리일까요? 제91조제1항은 청산 중의 법인이 (제90조에서 정하는 채권신고기간이 지난 후에는) 변제기에 이르지 아니한 채권도 변제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변제'라는 단어를 당연하다는 듯이 '갚는다'라는 표현으로 바꿔서 써 왔는데요,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용어로 변제란 채무의 내용인 급부를 실현함으로써 채권을 만족시켜 소멸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돈을 갚음으로써 채권을 소멸시키는 것인데요, 계약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여러 가지 예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를 해주기로 하고 돈을 받았다면, 바이올리니스트는 '바이올린 연주'라는 채무를 이행함으로써 상대방의 채권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변제의 일종이 되겠습니다. 변제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민법 교과서의 채권편을 참조하세요.


제1항에서 말하는 '변제기'란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권리가 있는 시기를 말합니다.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철수가 영희에게 1억 원을 빌려 주고 1월 31일까지 갚으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계약인 겁니다. 그러면 영희는 적어도 1월 31일이 되기 전까지는 돈을 갚을 필요가 없으며, 그럴 의무도 없습니다. 철수가 1월 28일에 "미안하지만 급전이 필요하다. 오늘 당장 갚아라." 라고 하더라도, 영희는 계약에 따라 굳이 미리 갚을 의무가 없으며, 요구를 무시해도 됩니다.


그러나 1월 31일이 지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영희는 그날까지 돈을 갚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철수는 채무자(영희)에게 채무의 이행(1억 원을 갚는 것)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를 변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새로운 개념을 하나 공부하고 지나갑시다. 중요한 것이라 빼놓고 가기가 힘드네요. 위의 사례에서 영희가 1월 31일까지의 '기한'이 정해져 있음에 따라 누리게 되는 이익을 기한의 이익이라고 합니다(1월 31일까지는 돈을 갚을 필요가 없는 이익). 즉 기한의 이익이란 기한이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사자가 받게 되는 이익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기한의 이익은 채무자만 누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채권자도 기한의 이익을 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의 사례에서 철수(채권자)가 1월 31일에 돈을 받기로 한 대신, 변제기까지의 기간에 하루당 1만 원의 이자를 받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영희가 자신의 기한의 이익을 포기하고 그냥 1월 28일에 돈을 갚아 버리면, 총 3만 원(3일 치)의 이자를 철수는 못 받게 됩니다(실제로는 이렇게 이자를 계산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예시로만 생각하세요). 이는 철수가 누리고 있는 기한의 이익에 손해가 생겼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한의 이익은 채무자뿐만 아니라 채권자도 가지는 경우가 있다고 대강 정리하시면 되겠습니다. 지나치게 상세하게 들어가면 어려워질 수 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자, 그럼 다시 제91조로 돌아옵시다. 이제 우리는 제1항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제1항은, 법인이 청산 중에 기한의 이익을 포기하고 그냥 변제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일찍 돈 갚으면 서로 좋은 거지, 그게 뭐라고 민법에 적혀 있을까?'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만, 기한의 이익은 '당연히' 마음대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영희의 사례와 같이, 기한의 이익을 맘대로 포기하면 채권자의 입장에서 오히려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민법 제153조제2항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153조(기한의 이익과 그 포기) ②기한의 이익은 이를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이익을 해하지 못한다.


이해가 가십니까? 제91조제1항은 당연한 내용을 당연히 써둔 것이 아닙니다. 주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규정을 둔 걸까요?

청산 중의 법인은 곧 없어질 법인이잖아요. 곧 없어질 게 뻔한데 "미안하지만 아직 변제기가 안 되어서 돈을 못 갚겠네..." 하면서 버티면, 채권자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갑니다. 기한의 이익이고 뭐고 그냥 빨리 내 돈 일부라도 갚아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변제기가 아니더라도 갚을 수 있다고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채권자를 보호하는 규정입니다.


제2항은 좀 어려운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조건 있는 채권'이나 '존속기간이 불확정한 채권'(존속기간'의' 라고 쓰여 있는데, '이'라고 보는 것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의미는 동일합니다)의 구체적인 의미를 다 알아보려면 채권법을 설명하는 데에만 하루 이상 걸리기 때문에, 그냥 단순한 예를 들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수리공인 영희는 예전에 A 법인과 계약을 맺고 A 법인 사무실의 외벽을 고쳐 주기로 했습니다. A 법인은 먼저 영희에게 선금으로 5백만 원을 주었고, 외벽 공사가 끝나면 그때 공사에 들어간 자재 비용까지 쳐서 나머지 돈을 주기로 했습니다(사실 이렇게 공사계약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예시로만 생각하세요).


그런데 영희가 외벽 공사가 끝나기 전에 그만 A 법인이 청산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A 법인은 제91조제1항에 따라 변제기에 이르지 않은 채권이지만 영희에게 빨리 변제를 해주려고 하는데, 문제는 채권액이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외벽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그 공사에 들어간 비용이 얼마인지 확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채권액 자체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법인이 돈을 갚고 싶어도 얼마를 갚아야 할지 책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제91조제2항은 이런 경우에 법원이 선임한 감정인의 평가를 받아 변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감정한다'라는 말, 가끔 들어 보셨지요? 감정인이란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어떠한 물건 등을 평가하거나 사실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일을 합니다. 채권자나 채무자 둘 중 한쪽이 불확정한 채권액을 결정하게 되면 공정한 결과가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감정인에게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내일은 청산에서 제외된 채권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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