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기억을 남 얘기처럼 회상하는 나는 당시에도 방관자였다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웬만해서는 포털 사이트의 뉴스도, 또 거기에 달린 댓글도 잘 살펴보지 않으려고 하지만 네이버의 뉴스와 댓글이란 발톱의 떼 같은 존재라 불쾌하면서도 묘한 중독성이 있어 멀리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뉴스 내용이야 그렇다쳐도 황당한 댓글이 가슴을 퍽퍽 치게 만들곤 한다. 예를 들어 2030 교통사고 환자가 늘었다는 기사에 달린 “이게 다 윤석열(or 문재인 or 한동훈 or 이재명) 때문이다” 류의 음모론적인 뚱뚱댓이 베스트 댓글로 달려 있을 때. 정치병이란 참 암만큼이나 무섭다.
이를 예방하고자 뉴스 페이지 자체를 피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뉴스 자체만으로 분노를 자아내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게 학교폭력 이슈다. 어떻게 저런 짓을 동급생에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잔혹한 뉴스에는 댓글도 가해자 규탄에 한마음 한뜻을 모은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나는 딱히 공감하지 못하는 반응이 있는데, “요즘 애들은 정말 문제”라는 식의 댓글이다. 잔인한 학폭이 2020년대에 갑자기 자연발생했나?
‘요즘 애들’ 타령이 싫은 건, 내 유년시절에도 다양한 학폭 사건을 수차례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는 뉴스거리도 안 됐다. 흔한 일이었으니까.
나는 지방 중소도시에서도 구도심에서 나고 자랐다. 50년은 족히 된 돌기와집이나 빨간 벽돌로 지은 허접한 다가구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찬 오래된 동네였다. 저출생의 쓰나미가 덮친 지금은 어린 아이 그림자조차 보기 힘든 초고령 동네가 되었지만, 덮어 놓고 낳던 시절에 가깝던 나의 유년 시절에는 제법 애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나에겐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동네 친구’는 한 명도 없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 ‘없이’ 손주가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조손가정이 자연스러운 가정 형태의 하나인 줄 알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도보 5분 안쪽으로 놀러갈 수 있는 곳에 사는 애들은 대체로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없었는지는 모른다. 부모 둘 중 하나라도 집을 찾아오는 경우는 유년시절 통틀어 한두 번도 안 됐다. 내가 모를 수는 없었다. 부모가 하루라도 왔다 가면 애들은 한 달을 내리 자랑하곤 했으니까.
이렇게 보면 아이들의 마음은 참 순수해 보이지만, 할머니와 살다가 엄마가 하루 왔다 갔다며 자랑하던 남자애 중 하나는 6년 내내 이유 없이 조그만 동급생을 후드려 패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얻어맞던 애는 경계선도 못 될 정도의 지적 장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두드려 맞을 때마다 눈물과 누런 콧물을 쏟으며 주저앉아 아기처럼 엉엉 울었다.
2000년대 초반이었다. 카메라가 달린 핸드폰이 빠른 속도로 전국민에 보급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 무렵 중학생들이 학폭 장면을 촬영한 ‘왕따 동영상’이 전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는데, 그 때도 우리 아빠를 비롯한 어른들은 혀를 차며 ‘요즘 애들’을 운운했다. 당시의 ‘요즘 애들’답게 우리 학교 애들도 그 조그만 애가 맞는 장면을 핸드폰으로 찍으며 깔깔댔다.
덩치가 작고 지적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의 대상이 된 건 아니었다. 못 사는 동네의 초등학교 고학년 반은 정글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남자애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나중에 니 애미처럼 X녀나 돼라” 같은 말을 정말 매일같이 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그 말의 의미를 알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단 그 대상이 ‘좋아하는 여자애’였다는 건 정말 지금 생각해도 기막힌 일이다.
잠겨 있는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금품을 털다가 경찰에 잡혀갔던 애도 있었는데, 걔는 다른 덩치 좋은 남자애들한테 남자 화장실에서 피가 터지고 화장실 유리가 깨지도록 맞았다. 그 모든 사건에 대한 처벌은 회초리를 맞는 정도가 다였다.
내 유년시절 기억을 남 얘기처럼 돌아보며 혀를 차고 있는 나는 그 당시에도 방관자였다. 그 정글에서 폭력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되지 않고 방관자로 남을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좀 사는’ 편이던 우리 가족이 그런 동네를 떠나지 못한 건 할머니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평생을 살아온 이 동네를 죽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신시가지고 학군이고, 1920년대에 태어난 할머니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래된 구시가지와 어울리지 않게 통나무로 멋들어지게 지은 거대한 새 집은 나의 부모가 할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평생 이 동네에 뿌리내리기로 결심했다는 방증이었다.
인간은 자기방어의 동물이다. 당시에는 자식 교육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나의 부모였지만 평생 떠날 수 없게 되자 그들의 기억은 결국 크게 미화돼 버리고 말았다. 우리 집에 놀러와서 슬쩍 장난감이나 장신구를 훔쳐간 애, 남자 화장실에서 들려오던 비명 소리, 엄마가 서울에서 사다 준 선물이라며 자랑스레 머그컵을 보여주던 아이의 손톱에 낀 떼, 교복 치마 아래 부른 배를 숨기고 뛰어가던 옆 골목 여자애의 탈색한 머리카락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엄마의 결론은 늘 같았다.
“그런 정글에서 자랐는데도 너희들 다 인서울 했잖아. 자기 중심이 잘 서 있는 애들이라면 학군지 아무 상관 없어. 오히려 학군지 애들이 온실 속의 화초라 멘탈이 약해.”
안타까운 일이지만 끔찍한 학폭을 다룬 기사를 모아보면 서울 도심의 뉴타운 또는 이른바 학군지에서 일어난 일은 거의 없다. 동급생 간의 폭력뿐만 아니라 학생이 교사를 폭행했다거나 하는 사건 역시 비슷하다.
대학에서 만난 동기들은 나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기겁했다. 그러면서도 밑바닥이나 다름없는 낯선 세계에 대해 신기해했다. 그들은 대체로 학군지에서 학교를 나온, 우리 엄마가 말한 ‘온실 속의 화초’들이었으나 결코 멘탈이 약하진 않았다. 서울 시내 학군지에서 독기 넘치게 공부해 명문 대학에 올 정도 인재의 멘탈은 못 사는 동네의 방관자로 살아남아 겨우겨우 대학 문 닫고 들어온 나 같은 인간의 멘탈보다 오히려 훨씬 강인했다.
그렇다면 굳이 세상의 나쁜 면만 보고 폭력의 위험을 감수하며 아이를 좋지 않은 환경에 굴릴 필요가 있을까?
토종여우처럼 거처가 생기자마자 새끼를 밴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거처도 거처 나름이었다. 동네 주변은 아파트 단지 하나 없이 빌라촌으로 감싸여 있었다. 주변에는 초등학교가 딱 하나 있었다. 물론 아무리 빌라촌이라지만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동네이니 당연히 내가 나고 자란 지방 소도시의 구도심에 비할 바는 아닐 테지만, 또 새로 만들어진 동네라고 해서 모범적이고 바른 애들만 모여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의 소리는 계속해서 내 자식을 이 동네의 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다고 외쳤다.
모든 것은 비율과 확률의 문제다. 이른바 좋은 동네일수록 나쁜 일이 일어날 확률도 낮은 건 팩트니까. 내가 살았던 정글 같은 세상의 존재 자체를 내 자식은 몰랐으면 했다. 나의 엄마와 아빠는 과잉보호라고 봤지만 내 마음은 그랬다. 아는 만큼 피하고 싶었다.